11살의 찬란한 알맹이를 지켜내는 법
중학교 대표로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갔을 때, 나는 몇 번이고 쓰고 지운 글을 들고 가 학원 선생님의 첨삭을 받았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영문학을 전공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재첨삭을 받았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남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반은 어른의 손이 닿은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음을 고백한다. 무대 위에서 내가 소리 낸 유려한 문장들은 내 것이 아니었기에,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내면의 공허함도 커졌다.
성인이 되어 영어 에세이 강사로 일하며, 나는 반대로 누군가의 입과 손이 되어주기도 했다. 완벽을 기하는 이 고조된 교육의 분위기가 만든 것은 진정한 상향 평준화인가, 아니면 수많은 껍데기인가. 나는 늘 완벽주의라는 틀에 갇혀, 내가 기대하는 나보다 저 멀리 앞서 있는 가상의 껍데기가 부서질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다.
오늘, 뉴질랜드에서 중학교에 입학한 11살 아들이 학생회 리더 지원서를 쓰겠다며 내 옆에 앉았다. 아들이 쓴 "I want to speak through for those who can't speak up" 같은 문장을 보며, I want to be a voice for…라고 고쳐주고 싶은 유혹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들의 글은 투박했고, 논리는 거칠었으며, 문장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문장에도 적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11살의 아이가 세상을 대변하겠다고 쓴 서툰 문장에는, 40대의 내가 다듬은 문장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날것의 생명력이 있다. 그 나이의 문장이 주는 힘은 완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만큼의 고민과 그 나이만큼의 용기가 담긴 정직함에서 나온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알맹이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내보이는 연습, 그 서툴고 거친 날것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용기에 대한 연습은 성인이 되면 도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의 세계는 이미 완벽하게 정제된 껍데기들의 전쟁터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라는 거대한 필터가 작동할 그날이 오기 전, 오직 이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나를 그대로 내보일 용기를 지켜주고 싶었다.
작성이 끝났을 때,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지원서를 보이며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 고칠 거 있어요?”
수만 개의 문장을 고쳐왔던 습관과, 완벽하지 않으면 도전조차 두려워했던 나의 오랜 강박이 잠시 충돌했지만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문법 오류 있나 만 확인 해 봐. 없으면 그냥 내. 정말 잘 썼네.”
더 나은 문장과 아이디어들로 경쟁력 있는 지원자가 되는 것은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들이 쓴 글이 타인의 손길로 빚은 껍데기가 아닌, 자신의 알맹이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 응원이었다. 아들은 웃으며 지원서를 가방에 넣었다.
인생에서 진짜 고쳐야 할 것은 아이의 서툰 문장이 아니라, 완벽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가로막으려 했던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아들이 제출할 저 편지는, 내가 영어 말하기 대회 때 외웠던 그 화려한 스크립트보다 훨씬 단단하고 아름답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교정되는 AI의 시대, 지금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퇴고하지 않을 용기'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11살, 아들의 찬란한 알맹이를 온 마음 다해 응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