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이해하는 법
친정엄마에게 문득 전화가 왔다. 정승제 강사가 나온 예능 프로그램을 봤는데 우리 둘째가 떠올랐다며 꼭 한 번 찾아보라고 당부하셨다. 영상을 찾아보니 정말 닮은 점이 많았다. 집과 사무실의 인테리어를 똑같이 맞춰놓는 것, 물건을 같은 배열로 늘어놓아야 하는 것, 좋아하는 물건이 단종될까 봐 미리 쟁여두어야 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의 기저에 ‘불안’이 깔려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둘째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자폐 스펙트럼의 범주에 있을 거라 의심하며 상담 센터를 찾았지만, 돌아온 답은 ‘불안장애’였다. 돌이켜본다. 나는 어떤 진단을 받아 아이를 선 너머에 두고 싶었던 걸까. 아이를 대하는 무엇을 위해 어떤 명확한 진단명이 필요했던 걸까.
아이에게 ‘불안’은 단순히 편안함의 결여가 아니라 치열하게 질서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일정한 패턴, 반복되는 루틴, 같은 음식, 같은 옷의 순서. 견고한 아이의 세계에 불확실성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맥없이 흐트러졌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쓰나미와 같이 아이를 압도했다. 아이의 불안은 고스란히 나의 불안이 되었고, 이 아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크면 나아질 거라고 너무도 쉽게 말했다. 하지만 불안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열 살이 된 지금도 아이는 여전하다. 여행지에서 7박 8일 내내 조식 뷔페의 같은 메뉴를 같은 그릇에, 같은 배열로 담아 먹어야 하는데, 음식끼리는 절대 맞닿아서는 안된다. 옷을 입는 규칙도 엄격하다. 파란 티셔츠엔 파란 신발과 모자를, 녹색 티셔츠엔 검은 신발을. 색이 충돌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어쩌면 세상이 무질서하다고 느낄수록,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려 온 힘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궤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아이의 세계에서 나는 늘 변수가 되어야 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는 곧 위기가 되었다. 파란 모자가 보이지 않으면 외출 직전까지 집안을 뒤집어야 했고, 끝내 찾지 못하면 아이는 무너져 울며 모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로 인해 온 가족의 외출이 버거워지고, 내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아이가 세상을 향해 균형을 맞추려는 방식은 내가 아는 것과 너무도 달랐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이에게 너무 많은 변화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성장이라 배우고, 유연한 사고는 미덕이라 가르친다. 하지만 정작 자신만의 질서가 간절한 이들에게 때때로 사회는 가혹하다.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특성을 고집스럽다고 손가락질한다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쩌면 불안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숙명일지 모른다. 아이는 그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만, 동시에 세상도 아이의 정교한 질서를 인정할 여지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정승제 강사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불안을 제거하지 않고도, 그 불안을 동력 삼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었기에. 내가 그토록 원했던 진단명은, 실은 아이를 선 너머에 두고 내가 조금 더 편해질 방법을 찾고 싶었던 이기적인 방편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이를 규정할 선이 아니라, 그 선을 연하게 지우는 일이었음을.
이제 나는 아이의 고집을 고치려 애쓰는 대신, 아이가 만드는 그 정교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맞춘 변화가 아니라, 각자가 세운 고유한 질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자신의 질서 안에서 비로소 평온하기를, 그 평온함이 아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버팀목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