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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민 살아진다

멈추지 않는 삶의 연속성에 대하여

by 아타마리에

죽음이 결혼을 소환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허망했다.

차가운 영안실안의 아빠의 손에서 내 손을 떼기도 전에, 남겨진 우리는 '장례'라는 비즈니스를 마주해야 했다. 골라야 할 장례식 물품 목록은 수십가지가 넘었고, 그것들을 비교하고 가격을 재는 행위가, 문득 몇 년 전 설렘 속에 준비했던 결혼식의 리스트를 소환했다. 그때와는 다른 감정의 괴리감 속에서, 나와 동생은 친정엄마를 대신해 끝없는 목록을 점검하고 나름의 최선으로 준비해야 했다. 삶과 죽음의 예식이 이토록 형식과 소비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 아이러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반복되었다. 불과 몇년 전 내 결혼을 축하하러 모인 지인들이 이번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쁨으로 모였던 연대와 슬픔으로 모인 연대가 결국 같은 얼굴들이라는 사실에서 나는 느꼈다. 인생이란, 태어남과 떠남이라는 반복된 예식을 통해 같은 사람들과 서로의 생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삶은 그러한 예식들의 연속이다.

오는 길에도, 돌아가는 길에도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살아간다.




멈춤, 그리고 여전히 살다

우리는 5일장을 치르기로 했고, 수많은 조문객을 집에서 맞았다.

눈물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엄마와 나는 매일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님과 음식, 설거지 그 반복되는 행위들은 우리를 비통함의 심연으로 빠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삶 그 자체였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나는 8개월 된 셋째와 두 아이를 챙겨야 했다. 조문객이 들어설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야 했고, 틈이 나면 큰 아이들의 밥을 챙겼다. 죽음이 요구하는 멈춤의 시간은, 젖병과 기저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살아 있는 생명 앞에서 매번 미뤄졌다.




생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곳

아버지를 마주한 영안실이 있던 병원은, 내가 첫 아이를 낳은 곳이었다.

작은 울음 소리로 생의 시작을 알리던 공간 옆에 큰 울음소리로 끝을 선고하는 장소가 나란히 있다. 출산의 고통 끝에 아이를 안고 웃던 나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버지를 붙잡던 나는 어쩌면 같은 복도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잔인할 만큼 가까이에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언제나 관성처럼 유지된다. 멈추지 않기 위해, 살아 있는 자들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살아가게 하는 실재의 힘

장례가 끝난 뒤에도, 해야 할 일들이 나를 움직였다.

이 복잡하고 고단한 인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을 것이다.

아이들의 밥상을 차리고, 젖병을 씻고, 세탁기를 돌리는 일, 운전대를 잡고, 누군가를 태우고 내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일터로 향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

이 일상의 반복이야말로 슬픔을 견디게 하는 생의 본능이었다.

삶은 단절되지 않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어디엔가 해는 떠있는 것 처럼, 비통한 순간에도 생명은 젖병과 기저귀를 요구하며 우리에게 계속 살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장례는 단지 망자를 떠나보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남은 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삶의 시작이다. 비통함을 누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엄마와 함께 음식을 나르고, 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손끝에 깃든 삶의 온기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끝났다. 음식은 남았고, 사람들은 모두 떠났으며, 내일은 또 다른 밥을 준비해야 한다. 흘릴 눈물이야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젖병을 씻는 손은 멈춘 적이 없다.


마치 누군가의 대사처럼, 살민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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