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내게 남긴 시간의 온기
할머니는 백 년을 넘어 101년을 사셨다.
할머니가 여든에 접어들던 해, 이민을 나와 사는 막내딸 집에 오셨다. 우리는 함께 남태평양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났다. 스무 살의 나와 여든 살의 할머니는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나란히 스노클링을 했다. 타오르는 선셋과 떠오르는 여명을 우리는 매일 함께 마주했다. 마지막 날 할머니와 엄마와 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갔다. 셰프의 화려한 디저트를 마지막으로 맛본 할머니는 “죽기 전에 이런 호사를 누려보니 이제 여한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꼭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스물 중반이 되었을 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적이 있다. 할머니는 새벽 네 시만 되면 어김없이 손녀의 아침을 준비하는 알람시계였다. 주말이면 할머니와 자전거를 타고 호수 공원을 돌고, 할머니가 좋아하던 칼국수집에 들러 멸치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국수 한 그릇에 손만두 한 접시를 대접하곤 했다. 할머니는 비싼 음식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남동생이 잠시 한국에 왔을 때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모시고 갔는데, "웬 짜파게티 같은 걸 2만 원씩 주고 먹냐"며, "너는 네 누나처럼 소탈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라고 크게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어떤 사랑하는 이들의 시간은 이처럼 다르게 교차한다. 나의 이십 대 후반은 할머니의 황혼기에 맞닿아 있었다. 할머니는 “네 결혼하는 건 기어이 보고 눈을 감아야 할 텐데”라는 말을 숙원처럼 입에 달고 사셨다. 내 삶의 새로운 막이 할머니의 마지막 장이 될까 봐 나는 속으로 가슴을 졸였다. 할머니는 결국 내 결혼식에 참석하셨고, 몇 년 후 큰 손주도 품에 안아 보셨다. 그리고 그 벅찬 순간이 내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이었다.
6.25 전쟁으로 피난을 온 할머니는 지금 내 큰아이 나이에 가족을 잃었다. 이모와 삼촌들은 매년 명절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했고, 금강산이 개방되던 해에 오빠를 만나러 다녀오셨다. 할머니는 오빠를 찾았지만, 수십 년을 가로지른 만남은 찰나에 불과했다. 인생은 스쳐가는 덧없음처럼, 할머니의 모든 순간이 그러했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그저 그 자리에 존재의 흔적으로 두고 묵묵히 살아내어 백 년을 완성하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유난히 아들을 아끼셨다. 1남 3녀 중 삼촌이 최고라고 늘 공언하셨다. 어릴 적 손주들 중 누가 제일 좋으냐 물었을 때, 아들 1위, 손자 2위, 딸 3위, 오직 하나인 손녀인 나는 4위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방학마다 할머니 댁에 가면, 수많은 손주들 중 할머니 옆자리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교회 찬송가 음을 맞추기 어렵다며, 목소리 좋은 네가 좀 불러달라며 부탁하셨다. 나는 할머니 집의 작은 카세트 오디오의 빨간 녹음 버튼을 눌러가며 노래를 몇 번씩 녹음했다. 다음 방학에 돌아오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새 테이프를 내밀던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테이프를 녹음해 주고, 밤에 떠들며 봉숭아물을 들여준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4위라는 할머니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십일 년 전 마지막 한국 방문 이후, 나는 할머니를 더 이상 뵙지 못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십 년은 이전 삶의 고난과는 다른 치매의 시간이었다.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백 살을 넘기고, 사랑하는 아들딸들 앞에서 비로소 평안히 잠드셨다. 감히 할머니의 백 년의 삶을 내가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이와의 수없는 이별과 희미해진 기억의 파편을 간직해 온 할머니의 시간, 하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사랑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던 시장의 활기찬 공기, 퇴근한 손녀와 나누던 밥 한 숟가락의 가장 소중한 온기, 가족과의 시간,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남태평양 바다의 푸른 숨결까지 모든 순간을 사랑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