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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axis Mar 20. 2020

공자 와  군자 1

배워서, 알아서, 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도올 학당과 수다 승철’에서 도올 선생은, 

 힘들게 배운 그로서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감을 갖고 있다" 했다.  

 

그 이유로 그는 '교학상장'을 강조한다.  

 즉, ‘배움과 가르침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닌,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공자의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교학상장’을 정의하기를,  

‘배웠으면,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해?”가 하나의 테제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누군가에게는 이제는 묻어두고 싶은  

 고풍스러운 발상이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 교학상장에 대한 나의 해석도 그와는 다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이야기가 소중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도올 선생과는 같이 옷 벗고 만난 적이 있다. ^^  

 대중탕에서 우연히 만났고,   

 반신욕 상태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삶은 스쳐가는 이야기’이며, 

 철학은 그 이야기를 성찰하는 중요한 도구라 생각하는 나와 

 철학은 인연이 깊은 편이다.  

 

 영혼이 탈탈 털릴 정도로, 삶의 문제를 고민했던 청소년기였다.  

 철학적 사고는 자연스레 나의 곁에 있었고,   

 과거 현자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기 위해, 체계적으로 철학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나름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어떤 답을 반드시 얻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나는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런 물음들이었다.  

 
  


 
  


 어쨌든, 그런 나에게는 동양 철학과 한국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유교,   

 즉 유학은 하나의 영역이었다.  

 (유교는 종교적 개념처럼 느껴져, 나는 유학 또는 유가 사상 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철학 하면, 사주 점집 관상 등을 떠올리는데, 

그것과는 많이 다른 영역이다.  

 또 유교 하면 고리타분한 가부장적 질서와 성차별 등 을 생각하는데,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각설하고, 

 유학(유가사상, 유교)은 공자의 사상에서 출발하여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양철학의 주요 세 가지 사상인 유불도[儒佛道] 삼가의 주요 축이다.  

 공자의 사상은 ‘논어’에 담겨있고, 그 중심 중에 하나가 배움(학)이다.  

 도올이 강조하는 교학상장이 배움의 중심개념 중에 하나이며,   

 교육을 중시한 사상이다.  

 (※ 한국의 교육열이 높고, 문맹률이 낮은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을 중시한   

 유교의 영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공자의 사상은  

 '배움'에서 시작하여 '지명[知命]'으로 이어진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지명[知命]은 천명 운명을 아는 것인데, 조금 더 깊은 뜻이 있다.   

 간단한 나의 해석은,  

  ‘나의 소명과 하늘의 뜻(자연의 순리 또는 절대자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깨달음이고 깨달음은 실천과 떨어질 수 없다.  

 유가 사상이 실천윤리이며 정치철학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공자의 사상은 많은 부분에서 서양 플라톤의 철학과도 닿아있다는 생각이다.)   

 
  




 유학과 공자의 사상을 얘기하자면,

 ‘논어’를 빼놓을 수 없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이편으로 시작하여, 요왈편으로 끝난다.  

 
  

 제1편이 학이편 즉 배움으로 시작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사람마다 배움의 속도는 다르다.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학지, 곤이불학’  

 
  

 ‘생이지지’는 날 때부터 아는 자, 천재를 말한다.  

 '학이지지'는 배워서 아는 것이고,

  고생고생 노력해서 겨우 배우는 것은 ‘곤이학지’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움의 속도나 재주가 아니라, 목적지(앎)에 도달하는 것이니,  

 결국은 같다.  

 늦게 가나, 쉽고 빠르게 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같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앎’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배워서, 알아서, 대체 무엇 하자는 것인가?  


.

.

.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참고: 

완성된 글이 아니며, 개인의 생각을 풀어낸 글이니, 

무단 인용이나 태클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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