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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Feb 20. 2022

비정상 상황 : 비행기가 없어도 관제석을 지키는 이유

가끔은 내가 관제석에 앉아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더해서는 내가 사는 이유라든지.


특히 요즘처럼 교통이 줄어 맡은 시간 동안 한 마디도 못하고 관제석에서 내려오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래도 나름 조금 비행기가 늘었다고 겨우 몇 마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긴 하지만. 비행장 관제사로서, 그 안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을 맡고 있는 관제를 하는 사람으로서 내 존재 이유는 뭘까. 그냥 앉아서 시간이나 때우라고 있는 직업은 아닐 테니까. 작년 이맘때에는 더 나아가서 '도대체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보다 진지하고 심도 있는 인생 고민을 했지만 그건 잠시 제쳐두고. 그래서 왜 관제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지 고민을 해 봤는데 결국에는 비정상 상황 때문이다. 동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든지, 착륙해야 하는데 랜딩기어가 내려와 있지 않다든지 하는 류의 항공기가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비상 상황에서는 바깥에서 항공기를 쳐다보고 있는 내 역할이 중요해진다.


훈련관제사로서의 직무 교육을 받을 때 우리는 각종 비상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줄줄 외워야 한다. 가볍게는 사용 중인 장비의 고장부터, 무거운 상황으로 가면 항공기 자체에 문제가 생겼거나 활주로나 유도로 위에서 스스로 이동이 불가할 때 관제사로서 곧바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배운다.


작년에는 인천공항에서 한 항공기가 이륙 포기(RTO)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날 나는 주간 근무일이었고 짜인 스케줄에 따라 교통량이 회복되었을 때를 대비한 시뮬레이터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한창 훈련 중인데 갑자기 조장님께 급하게 연락이  타워로 복귀해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 생각하면서 동시에 핸드폰에  있는 문자를 확인했다. 이륙하던 항공기가 급히 제동을 걸어 이륙을 포기하고 활주로에 기동 불가 상태로 멈춰있다는 메시지였다. 급히 제동을  바람에 랜딩기어 바퀴가 16개나 파손되었고 연기가 발생해서 비상 상황으로 간주되어 공항소방대가 출동한 상태였다.


항공기가 활주로를 열심히 달리다가 이륙을 포기하는 상황은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 내가 약 2년 동안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딱 한 번 마주했을 정도다. 그마저도 다른 곳에서 교육받다가 비상상황이 생긴 것을 전파받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식을 듣고 불길이라도 번지면 안 될 텐데라는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잘 마무리되었고 항공안전장애로 보고되었다.

항공안전법 시행규칙 별표 20의 2
의무보고 대상 항공안전장애의 범위 중
나. 항공기가 다음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이륙 활주를 중단한 경우 또는 이륙을 강행한 경우
1) 부적절한 기재, 외장 설정   2) 항공기 시스템 기능 장애 등 정비 요인   3) 항공교통관제지시, 기상 등 그 밖의 사유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관제사는 교육을 받는다. 기동 불능 항공기를 처리하는 방법, 항공기 연료가 새서 유도로가 미끌미끌해졌을 때의 대처법, 무선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대응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다. 사람이다 보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떤 이론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때 참고하라고 관제석 옆에 비상상황 대처 매뉴얼 북이 같이 놓여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대비를 해 두지만 가끔은 관제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사고가 발생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든다.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스스로 준비가 안 되어있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관할구역에 비행기가 한 대도 없어도 우리는 반드시 관제석을 지켜야만 한다-는 결론이 났다. 실제로 우리 팀 선배 관제사 한 분이 계류장 근처 지역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걸 직접 목격하고 신고했던 사례가 있었다. 관제사의 의무인 '항공기간 충돌 방지' 이외에도 공항 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비정상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감시자 및 조력자 역할을 또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관제사로서의 임무가 아니어도 나는 내 주변사람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진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체 왜 사는 걸까, 하는 고민은 잠깐 접어둬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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