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입던 학생 시절, 친구들과 나란히 걸어가던 하굣길에서의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 일렬횡대 한 우리 셋의 가운데에는 똑똑한 SJ가 있었고, 나와 다른 친구는 각각 왼편과 오른편에서 서로 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SJ는 왼쪽 귀로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른쪽 귀로는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 할 말만 하던 두 명의 수다가 끝나고 SJ는 천천히 우리가 했던 말을 정리했다. 결과는 퍼펙트! 내 얘긴 내 얘기대로, 다른 친구 얘긴 그 얘기대로 완벽히 들어냈던 것이다. 이런 멀티태스킹 실력은 일상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지만, 관제사에게는 중요한 능력이다.
비행장 관제사는 공항의 일정 구역,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맡은 구역인 '내 땅'에 들어온 모든 교통과 인원을 통제한다. 그래서 항공교통관제라고 해서 오로지 비행기만 관제하는 것은 아니다. 공항에서 주파수로는 조종사와 소통하고, 작은 무전기로는 내 땅에서 움직이는 견인, 점검, 작업 차량, 인원과 소통해야 한다. 가끔은 관제석 전화기로 다른 기관의 관제사와 협의하거나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관제석에 앉았을 때 나는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무려 세 개나 갖춘 셈인데, 이게 가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언젠가는 정신이 없는 통에 TRS라고 불리는 무전기에 해야 할 말을 마이크를 잡고 주파수로 날려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끌고 가는 견인 차량에게 이동 지시를 할 때에는 유도로를 포함해서 한국어로 지시를 하는데, 무전기에 이 말을 하지 않고 갑자기 마이크를 잡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KAS0호, 유도로 R12, RC로 주기장 0번 이동하십시오."
*KAS : 지상조업사인 한국공항 소속의 견인 차량을 부르는 명칭.
하필 그 주파수에는 내 주파수를 모니터 하는 비행기가 한 대 있었고, 위와 같이 말한 후 주파수 허공에 싸-하게 감도는 어색함과 창피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며칠 전, 인천에서 일하는 다른 관제사 친구를 만나서 이 얘길 했더니 본인도 그래 본 경험이 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랑 반대로 무전기에다 대고 조종사한테 해야 하는 관제 지시를 영어로 해버렸다면서. 바쁘면 나만 헷갈리는 게 아니었구나 하며 둘이 깔깔대며 웃었다.
각각 다른 여러 대상과 교신하다 보면 머릿속도 바쁘지만 더해서 손도 바쁘다. 한창 교육을 받을 때, 습관적으로 나는 마이크를 오른손에 쥐었는데 다른 선배 관제사들은 항상 왼손에 마이크를 쥐었다. 왜냐하면 우리 자리에서 다른 기관과 협의를 하기 위해 있는 관제석 전화기가 책상 오른편에 있어 수화기와 무전기는 오른손에 쥐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또 장비를 조작하기 위해서 마우스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오른손잡이일 때) 오른손이 더 바쁘기도 하다. 이제는 나도 익숙하게 왼손으로 마이크를 쥐지만 오른손잡이인 탓에 습관을 빨리 고치기가 좀 힘들었다. 가끔 너무 바쁠 때에는 두 손이 모자라기도 해서 차라리 문어처럼 팔이 여덟 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본격 옥토-컨트롤러가 되는 상상을 해봤다!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쥐고, 다른 손 세 개로는 무전기 세 대를 각각 쥐고, 또 다른 손은 전화기 수화기를 붙들고 있고, 나머지 손들으로는 여러 장비를 조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왜 팔이 두 개뿐일까? 여덟 개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이 딱 두 개만 더 생기면 감사할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가진 김에 하나만 더 빌어보자면... 입도 두 개가 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