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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Feb 18. 2022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confirm, FOLLOW THE GREENS?

내비게이션 없이 초행길을 든다는 건 요즘 세상에선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아직 내비게이션이 세상에 없던 시절,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면 항상 아빠가 핸들 사이에 지도를 끼워두고 운전하셨던 기억이 난다. 전보다 면허를 따기 쉬워진 것도 전부 세상이 발전하면서 그 넓은 지도가 다 작은 화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만약 운전을 할 때 내가 가야 하는 경로의 도로 한가운데에 초록색 불빛이 들어오면 어떨까? 굳이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아도 도로의 초록색 빛만 따라가면 손쉽게 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운전하기 너무 편리해지지 않을까?



왼쪽이 관제사 시점, 오른쪽이 조종사 시점.
인천공항 항공등화제어소



신기하게도 이미 유수의 공항들은 내가 말한 방법을 사용해서 각각의 비행기가 가야 하는 유도로의 가운데 녹색 등을 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공항의 유도로중심선등(TCLL, Taxiway Center Line Lights)은 초록색 등화(Green Light)로 이루어져 있다. 밤이 어두워 유도로 중심선이 보이지 않는 경우 그 유도로 선 위에 초록색 등을 심어 항공기가 유도로를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등화시설인데, 요즘에는 이걸 서로 다른 항공기에 적용해서 각자의 항공기에게 개별 등화 경로를 제공하기도 한다. 출발 항공기에게는 주기장부터 활주로까지의 표준 경로에 초록 등을 쭉 밝혀주고, 도착 항공기에게는 착륙한 후 활주로부터 항공기에게 배정된 주기장까지 표준 경로에 초록 등을 쭉 밝혀준다.





방금 착륙한 ABC123이라는 항공기에게 50번 주기장이 배정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도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항공기의 표준 이동 동선은 C->CROSS RWY 33L->B->A8->R8->R6(R4)->GATE 50이다. 길이 아주 복잡한 건 아니지만, 만약 이 항공기의 조종사가 인천공항은 처음이라서 유도로 이름을 전혀 모른다면? 유도로 이름을 불러줘도 한참 도면을 보며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는 표준 동선상 유도로가 사용 불가 상태인 경우 다른 유도로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 길이 너무 복잡해서 유도로를 다 불러주기가 어렵다면? 이럴 때 관제사도 편하고 조종사도 편한 방법이 '녹색 등을 따라가세요-하는 Follow the greens.'다. 특히 나는 비정기편인 비즈니스젯이 공항에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100% 이런 지시를 하고, 외국 항공사가 인천공항 유도로 이름을 잘 모르는 경우 또 이런 지시를 하며 유용하게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도 출발하는 KLM 항공기에게 FTGs(Follow The Greens) 지시를 줘 봤다.

"KLM123, follow the greens, hold short of A."

보통은 이런 지시를 하면 90% 이상의 항공기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복사 붙여 넣기 해서 리드백한다. 근데 흥이 넘치는 항공사답게 똑같이 지루한 관제용어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Short of A, with the greens, KLM123."

재미있게도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관제용어는 'Follow the greens, hold short of A. (녹색 등화 따라 이동하시고요, A 유도로 전에서 정지하십시오.)'지만 영어가 익숙한 외국인 조종사들은 아주 짧게 리드백하기도 한다. 'Short of A, with the greens. (A 유도로 전 정지요, 녹색 등 따라가다가요.)' 관제사로서 이것저것 말 많이 하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기 때문에, 최대한 관제 용어를 축약해서 쓰려고 하는 내 입장에서는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FTGs의 효과는 대단하다.

관제사 입장에서는 경로가 복잡해지는 경우 그 많은 유도로 다 불러주지 않아도 돼서 좋고, 조종사 입장에서는 도면이나 차트 볼 거 없이 초록색 불만 따라가면 되어서 좋다. 대신 표준 이동 동선 말고 다르게 항공기를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등화를 제어하는 장비(A-SMGCS) 모니터 화면에서 개별 등화 경로를 조작해야 한다. 이게 마음처럼 잘 안되고 가끔 경로가 꼬여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난감할 때도 있다. 관제하느라 바쁜데 등화 경로까지 신경 써야 하면 손이 다급해지고 마음이 들썩거리기도 한다.


등화가 조종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경로가 아닌, 이상한 경로로 켜져 있는 경우에 우리는 가끔 확인차 문의를 받기도 한다. 대부분은 관제용어로 'Confirm follow the greens? (녹색 등화 따라서 이동하는 거 맞습니까?)'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우리는 모니터 화면을 보고 본인이 의도한 경로가 맞다면 'Affirm. (네, 그렇습니다.)'이라고 화답한다.






@마녀사냥. JTBC.



아래 쓰는 관제용어로 멋지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다.


누군가와 썸을 타고 있는 것 같다면, 상대방에게

"Confirm, follow the greens? (그린라이트인가요?)"

라고 물어보자.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라면 분명히

"Affirm. (네, 맞아요.)"

이라고 대답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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