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진 Feb 20. 2022

비행기도 몸에 그림 그리는데, 타투하면 외 않되?

선생님, HL8346이 그랬어요!

내 몸의 타투는 튀려고 새긴 아니라, 기억하려고 새겼다.

항공기 레그 넘버(Registration Number)라는 것이 있다. 쉽게 설명해서 각 기체의 고유번호 같은 것인데, 주민등록번호랑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근데 우리나라의 항공기로 등록되면 그 레그넘버가 HLXXXX과 같이 HL+4자리 숫자로 정해지는데, 딱히 흥미로운 문자 형식은 아니다. 같은 HL1234여도 계속 목적 공항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의 편명이 계속 변하기도 해서 별로 기억에도 안 남는 숫자다. 그런데 나는 인천공항 주기장에 가끔 말없이 서있는 대한항공 소속의 B777-300ER 기종인 HL8346을 기억한다. 이 항공기가 왜 눈에 띄냐. 바로 얼굴에 타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엔 249번 게이트에서


또 어떤 날엔 251번 게이트에서


여긴 252번 쯤일까. 비오는 날에도 여전히



이 항공기를 처음 만난 건 작년에 친한 친구가 출국하던 날, 타워로 출근하는 길에서였다. 친구가 올라탔다고 하는 비행기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보는데 눈 아래쪽 뺨에 '200th'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게 아닌가. 다른 친구들에게는 없던 처음 보는 마크인지라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그 마크의 정체는 무려 200번째로 대한항공에 도입된 보잉기를 축하하는 기념 타투였다. 짜식 대단한 의미도 있고 제법 젠틀한걸?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모종의 동질감도 느꼈다. 내 몸 어딘가에도 타투가 있기 때문이다.


보기에 예쁘라고 장난으로, 또는 어린 치기에 새긴  아니다. 나름 '이제 나는 정신적으로 독립했어'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여러 차례 고민하고  사람들에게 어떠냐 물어보고 결정한 거니까. 솔직히 말하면 거의 평생을 얌전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가두었던  모습을 스스로 깨고 싶었다. 요즘에도 사람들이 타투를 많이  좋게 생각하나 싶어서, 할까 말까 수백  고민하는 사이에 인터넷에도 한참을 검색해봤다. 결국엔  하고 싶은   !!!라는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저질렀다. 사실 답정너였는지도 모른다.


교실에 있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선생님들에게 나는 말 잘 듣고 착한 애로 통했다. 말썽 안 부리고 시키는 건 다 하는 범생이 같은 학생.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게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근데 머리가 좀 크고 반항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보니 왜 그렇게 살았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교칙 좀 어기면 어떻고, 꾀병 좀 부리면 어때? 하지만 학생일 때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각인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바람은 진짜 나쁜 바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기적이기도 해야 한다.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다. 나는 편하게 세상 살기 위해 알아야 했던 이 기본 상식(?)들을 작년에 겨우 깨우쳤다. 그냥 좀 편하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도 되겠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은 기념으로 몸 어딘가에 작게 뭘 그려 넣었다.


200th라는 타투를 하고 있는 친구를 보면 '와 쟤가 벌써 대한항공에 들어간 200번째 보잉 비행기구나!' 라고 기억하는 것 처럼, 이제는 내 몸에 적당히 자리 잡은 그 그림을 보면서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하고 생각하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제발 일 열심히 하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