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HL8346이 그랬어요!
내 몸의 타투는 튀려고 새긴 아니라, 기억하려고 새겼다.
항공기 레그 넘버(Registration Number)라는 것이 있다. 쉽게 설명해서 각 기체의 고유번호 같은 것인데, 주민등록번호랑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근데 우리나라의 항공기로 등록되면 그 레그넘버가 HLXXXX과 같이 HL+4자리 숫자로 정해지는데, 딱히 흥미로운 문자 형식은 아니다. 같은 HL1234여도 계속 목적 공항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의 편명이 계속 변하기도 해서 별로 기억에도 안 남는 숫자다. 그런데 나는 인천공항 주기장에 가끔 말없이 서있는 대한항공 소속의 B777-300ER 기종인 HL8346을 기억한다. 이 항공기가 왜 눈에 띄냐. 바로 얼굴에 타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항공기를 처음 만난 건 작년에 친한 친구가 출국하던 날, 타워로 출근하는 길에서였다. 친구가 올라탔다고 하는 비행기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보는데 눈 아래쪽 뺨에 '200th'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게 아닌가. 다른 친구들에게는 없던 처음 보는 마크인지라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그 마크의 정체는 무려 200번째로 대한항공에 도입된 보잉기를 축하하는 기념 타투였다. 짜식 대단한 의미도 있고 제법 젠틀한걸?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모종의 동질감도 느꼈다. 내 몸 어딘가에도 타투가 있기 때문이다.
보기에 예쁘라고 장난으로, 또는 어린 치기에 새긴 건 아니다. 나름 '이제 나는 정신적으로 독립했어'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여러 차례 고민하고 또 사람들에게 어떠냐 물어보고 결정한 거니까. 솔직히 말하면 거의 평생을 얌전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가두었던 내 모습을 스스로 깨고 싶었다. 요즘에도 사람들이 타투를 많이 안 좋게 생각하나 싶어서, 할까 말까 수백 번 고민하는 사이에 인터넷에도 한참을 검색해봤다. 결국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저질렀다. 사실 답정너였는지도 모른다.
교실에 있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선생님들에게 나는 말 잘 듣고 착한 애로 통했다. 말썽 안 부리고 시키는 건 다 하는 범생이 같은 학생.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게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근데 머리가 좀 크고 반항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보니 왜 그렇게 살았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교칙 좀 어기면 어떻고, 꾀병 좀 부리면 어때? 하지만 학생일 때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각인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바람은 진짜 나쁜 바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기적이기도 해야 한다.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다. 나는 편하게 세상 살기 위해 알아야 했던 이 기본 상식(?)들을 작년에 겨우 깨우쳤다. 그냥 좀 편하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도 되겠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은 기념으로 몸 어딘가에 작게 뭘 그려 넣었다.
200th라는 타투를 하고 있는 친구를 보면 '와 쟤가 벌써 대한항공에 들어간 200번째 보잉 비행기구나!' 라고 기억하는 것 처럼, 이제는 내 몸에 적당히 자리 잡은 그 그림을 보면서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하고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