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글을 쓰다가 틀린 부분이 생기면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 또는 브런치 같은 어플로 사이버 세상에서 글을 쓰다 보면 backspace와 같은 키를 눌러 틀린 부분을 아예 흔적도 안 남기고 없애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의 속성은 좀 다르다. 흘린 물은 손으로 떠서라도 주워 담을 수 있지만 흘린 말은 절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억을 잊게 하는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다면. 호그와트와는 거리가 아주 먼 곳이지만 관제실에는 이 마법 같은 일이 아주 자주 발생한다.
편명의 숫자가 1814인 어느 항공편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ABC1814(에이비씨 원 에잇 원 포)라고 본인의 호출부호를 말해야 하지만, 어떤 게 조종사를 헷갈리게 했는지 자꾸 1 대신 8이 먼저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니까
“ABC8... correction, 1814.(에이비씨 에잇... 코렉션, 원에잇원포.)"
하고 말하곤 했는데 이게 한 번이 아니라 교신하는 내내 반복되니까 정직하게 계속 correction을 내뱉는 조종사의 말이 웃겨서, 결국 마지막 교신을 끝내고는 웃음이 터져버렸었다.
숫자 하나 정도의 작은 실수라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왜 그 조종사는 계속 'correction'으로 관제교신을 고쳐야만 했을까? 만약 동시간대에 ABC814라는 항공편이 있었다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ABC814라는 항공편에게 이동허가를 줬는데 ABC1814의 조종사가 순간 착각으로 이동허가를 복창한 후 본인의 콜사인을 ABC814로 잘못 말해버린다든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엉뚱한 항공기를 이동시켜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직 말이라는 수단으로만 소통하는 관제 교신에서, 교신의 정확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말하다가 틀린 부분이 생기면 직전의 사례처럼 반드시 ‘corre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방금 전에 내뱉은 말을 정정해야만 한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면,
항공기를 유도로 R1로 이동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생각해 보자.
"Taxi via R1. (R1 유도로로 이동하십시오.)"
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Taxi via R2. (R2 유도로로 이동하십시오.)"
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다. 이럴 때
"Taxi via R2, correction, R1. (R2, 정정하겠습니다. R1 유도로로 이동하십시오)"
correction을 쓰면 R2라는 단어는 마치 마법처럼 교신에서 아예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correction을 사용하지 않으면
"Taxi via R2,,, ah,, R1. (R2, R1 유도로로 이동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게 되는데,
이러면 R2 유도로 다음에 R1 유도로로 이동하라는 뜻이 되어버리므로, 원래의 의도와 아주 다르게 관제를 해버릴 수가 있다.
이렇게 관제교신에서는 그 숫자와 단어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관제사도 그렇고 조종사도 그렇고 '사람이다 보니' 바쁘거나 정신이 없는 순간에는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최근에 인천공항은 탑승동쪽 계류장 공사로 'AN(알파 노벰버)'라는 유도로가 사라졌는데, 원래 탑승동 북측에 해당하는 102, 104, 106~128, 130번 게이트가 이 AN유도로와 연결되어 있다가 R9이라는 유도로로 연결 유도로가 바뀌었다. 그래서 탑승동 북측 게이트에서 후방견인한 후, 3활주로로 나가기 위해서 비행기는 R9유도로-R21유도로-R10유도로로 이동해야 하는데, AN유도로가 사라진 걸 알고 있는데도 관성처럼 가끔 AN유도로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할 때가 있다. 물론 실수를 깨닫고 바로 고쳐주기는 하지만. 이럴 때에도 유용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correction이다.
"Taxi via AN, correction, R9, R21, R10. Hold short of M.(AN, 정정합니다, R9, R21, R10 유도로로 이동하십시오. M유도로 전 정지하세요.)"
이렇게 곧바로 실수를 고친다면 관제 교신에는 큰 문제가 없어진다. 그야말로 correction은 내 실수를 없던 걸로 만들어주는 마법주문과 같은 단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실수를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조종사에게서 관제지시 확인을 받을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confir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단어 'confirm'은 확인하겠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와 같은 뜻이다.
"Taxi via AN, R21, R10. Hold short of M."
라고 말한 경우, AN유도로는 사라졌으므로 업데이트된 도면을 보고 있는 조종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Confirm AN?(AN유도로요?)"
위에 나열한 사례와 같이 더블체크를 하면 서로의 실수를 줄이고 사고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에 관제사와 조종사는 관제지시 복창(readback, 리드백)과 재확인(hearback, 히어백)에 항상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끔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관제사와 조종사도 사람인지라 관성처럼 익숙한 숫자나 유도로를 말하는 등 교신할 때 실수할 수 있다. 나는 훈련을 받던 시기에는 특히나 항공기 편명을 부를 때 숫자를 잘못 말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124편을 214편으로 부른다든가 하는 실수가 잦았다. 동일한 시각에 124편과 214편이 같이 있다면 아주 위험하고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숫자를 또박또박 읽는 버릇을 들였고, 예전처럼 편명을 가지고 실수하는 일은 적어졌다
관제교신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의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야기했던 것처럼, 문자메시지나 글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면 지울 수가 있지만 잘못 내뱉은 말은 '우리 방금 했던 말은 없었던 일로 하자!'라는 식으로 무마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과 발화된 말이 그냥 달랐던 말실수 또는 실언이라면 별 일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 있겠으나,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충분히 기분이 나쁠만할 정도로 망언을 한 것이라면 이건 실수로 가볍게 치부하고 넘기기 곤란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말은 그 사용자에 따라 결과가 한없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