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를 하다 뭔가 꼬인 날엔 숙직실에서 잠을 자기가 어렵다. 눈을 감고 빨리 잊어보려고 해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진다. 어디까지 늘어나나 지켜보던 생각은 지구 반대편 끝에 닿았다가 저 은하계 멀리 달아나기도 한다. 결국에는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생각으로 상상이 마무리되긴 하지만.
가령, 우리가 사는 거대 우주는 뉴런이 여럿 모인 뇌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얘기를 떠올리면서, 혹시 우리 은하도 그냥 외계인 뇌 속의 뉴런보다도 작은 무언가인 건 아닌지하는, 그럼 지구 속의 내가 고작 먼지만도 못하게 작아져서 나 보다도 작은 내 고민은 이 넓은 세상에서 하등 무소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피어오른다. 과거에서 현재를 배워오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해야 뭐든 잊어버리기가 편해진다.
우리 은하는 뇌 속의 뉴런만도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거대 외계인이 있고, 그 외계인이 살아가는 더 큰 세상이 있고, 또 그 세상을 가진 우주가 있고, 또 그 우주는 어느 누군가의 뇌 속이겠거니 하면 그야말로 이 세계는 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곳이라서 그냥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먼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일생동안 품어온 고민은 상상 앞에 초라하게 무릎 꿇는다. '고생했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인사로 나누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모두에게 매일매일은 고생길인데, 이렇게 힘들어봤자 어차피 초거대 외계 생명체 속의 외계 생명체 속의 또 무언가 속의 세포만한 우주가 사라지면 그렇게 힘들었던 모두의 고생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텐데, 그거 되게 억울한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하면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행동이 당연한 것인데,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20년 기준으로 0.8명인 걸 보면 현대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하지 않은 일인가 보다. 두 명의 개체가 채 한 명의 개체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얘기인데 이 얼마나 본능에 반항하는 행위 인가 한다. 생각보다 인생이 밝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난 후부터는 조심스레 딩크를 생각하기도 한다.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화가 더 많아 보이는 이 세상을 굳이 물려줄 이유가 있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굳이 그럴 필욘 없지. 전문가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현저히 낮은 출산율에 대한 이유를 '한국의 심화된 경쟁사회'에서 찾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동의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온 세상의 도움 덕에 태어난 사람이다. 사실은 태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 아빠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서 계신 분들인데, 엄마는 5남매 중 막내로, 아빠는 무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외할머니는 늦둥이인 엄마를 지우려고 병원에 찾아가셨었다고 한다. '아기가 너무 커서 지울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덕에 엄마는 세상 빛을 봤다. 친가도 비슷했다. 우리 친할머니는 아빠를 임신한 걸 아시고는 애를 떨어 버리려고 산 중턱에서 마구 구르셨다고 한다. 그렇게 산에서 굴러버렸는데도 튼튼히 살아남아 아빠도 세상 빛을 봤다. 기구하게도 낮은 확률을 뚫고 같은 동네에서 난 두 젊은이 덕에 내가 세상 빛을 봤다. 인생은 기구하다.
내가 지금 내 인생 속의 노키즈 또는 예스키즈를 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단 얘기다. 나처럼 안 태어날 것 같았던 사람도 태어나 세상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판국에 내 아기가 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미래를 미리 정하면 쓰나. 근데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결국 대한민국의 붕괴가 올만한 상황은 미래 세대를 생각해보면 좀 두렵다. 아직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또 나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