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탑 창 너머> 1회 기고문
관제사로 일하며 내 안에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실수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다. 게다가 안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실수에 관대해지기가 더더욱 어렵다. 하루에 1,200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공항에서 일하다 보면, 내 의지와는 달리 머릿털이 쭈뼛서도록 긴장하는 순간이 생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출발편과 도착편이 몰려 문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기도 한다. 동료의 조언 덕에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적도 있다.
우리는 모두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보니 관제사도 실수하고, 조종사도 실수하며, 지상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종종 실수를 하게 된다. 예컨대 관제 교신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 실수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부를 수 있다. 출발을 위해 터미널 게이트에서 유도로로 비행기를 밀어내는 것을 ‘후방견인’이라고 하는데, 인천공항에서는 계류장 관제사가 이 후방견인 허가를 담당한다. 허가를 주면서 비행기 머리가 어느 방향을 보게 할지도 관제사가 결정하는데 ‘동쪽(East)‘을 ‘서쪽(West)’으로 잘못 얘기하거나, ‘북쪽(North)’이라고 얘기했는데 조종사가 ‘서쪽(West)’이라고 알아듣는 일은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계류장의 효율적인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내 실수나 잘못으로 상황이 복잡해진 경우에는 성격상 빨리 털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퇴근길에 오늘은 뭐가 부족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집에 와서도 비행기와 공항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어느 날엔가 입사 동기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을 때, 자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네가 완벽주의자인 게 아니냐고 되물어왔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 자신이 실수에 너무 엄격한 완벽주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쌓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스스로를 매우 높은 기준에 가두고, 실수를 과도하게 자책하며,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했다. 행동의 결과가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불만족스러웠던 건 결국에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내가 스스로에게 높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처럼 세상도 그러할 것이며, 절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우리는 아직 과정보다 성공적인 결과에 손뼉 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5세 고시’에 응시하도록 강요하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승진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과정과 무관하게 낙오자가 되며 영원히 기회를 잃은 것처럼 인식된다. 곧 실수가 무능함이나 부주의함으로 여겨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더해, 항공분야는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반드시 더 안전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실수를 징계하고 문책하는 사회 분위기는 오히려 실수를 공유하지 않고 감추도록 만든다. 내가 실수 앞에 지나치게 가혹했던 이유는 세상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는 탈락 위기에 처한 도전자들의 마지막 변론에 가끔 이런 단어가 등장한다. ‘바운스 백(bounce back)', 실수로 초래한 위험을 극복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미다.
실수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자는 얘기는 아니다. 실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며, 명확한 피드백과 점검을 통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나는 실수로서 인생을 배워가고 있다. 좌절과 회복의 과정이 삶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고, 완벽주의적 성향은 목표에 올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그러니 실수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발전을 위한 또 다른 기회로 여기는 건 어떨까? 실수를 자책의 대상이 아닌 성장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실수조차 아름다워질 수 있는 우리 사회를 나는 묵묵히 기다린다.
•국민일보 오피니언란에서도 해당 기고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월 1회 연재)
<실수를 아름다워하는 세상>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49011024&code=11171477&sid1=col&sid2=1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