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관제탑 창 너머> 2회 기고문

by 소진


대한항공 B787 구도장과 신도장



세상에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비행기를 움직이는 항공 산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느리게 발전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원격 관제기술을 개발하고 AI 데이터 분석을 통해 최적의 비행경로를 추천하기도 하지만, 항공교통관제의 핵심인 음성 교신에서는 아직 오래전 방식을 고수한다. 지금도 관제사와 조종사는 약 100년 전에 시작된 기술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1930년, 세계 최초로 무선 항공관제업무를 수행한 곳은 미국 클리블랜드 공항 관제탑이다. 클리블랜드 관제탑은 공대지 양방향 라디오 통신 시스템을 운영했다. 동시에 클리블랜드시 직원에게 관제용 무전기 면허를 발급했는데, 이 면허가 지금의 항공교통관제사 자격의 기술적 뿌리가 되었다.


가끔은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처음의 주파수 교신 방식으로 항공교통관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때가 있다. 관제 교신은 주로 단방향 송수신(half duplex)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주파수 하나에 비행기 여럿이 몰리면 교신이 차단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해 관제사를 골치 아프게 한다. 그럴 때면 ‘요즘 비행기에는 디지털 기기도 다양하게 장착되어 있으니, 스마트폰 메신저처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예컨대, 조종사가 비행시스템 모니터에 ’10번 후방견인 요청‘을 입력 후 관제사에게 전송하면, 나는 요청에 ’머리 방향을 북쪽으로 하는 후방견인 가능‘ 또는 ’후방견인 불가능‘을 판단해 터치스크린에 입력 후 허가를 보내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텍스트 기반 교신은 분명히 실현 가능한 기술이지만, 그럼에도 항공은 보수적이고 신중한 방식을 택한다. 항공산업이 안전과 신뢰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로 무선 통신하는 방식은 수많은 교신 기록으로 그 안전성과 신뢰도가 증명됐다. 그런데 갑작스레 디지털 문자로 교신을 주고받게 되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가장 먼저 예상되는 것은 관제사와 조종사의 실시간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관제 교신은 매우 복잡한 동시에 반드시 실시간이어야만 한다. 계류장관제사는 주기장에 설정된 여러 가지 후방견인 방법 중 하나를 지정해서 조종사에게 허가를 주고, 이동 경로도 상황에 따라 계속 변경해 안내한다. 항공기끼리의 회피를 위해 즉각적인 송수신이 필요하기도 하다. 텍스트 입력과 수신 확인에 시간을 쓰면 긴급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또 다른 문제는 표준화되지 않은 기술을 실제 업무에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항공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규칙과 기술을 공유한다. 나라별로 항공시스템의 구조가 다 다르면 혼란이 생기게 되므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표준을 정하고 그 표준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항공의 흐름이다. 효율성과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안전과 신뢰를 우선으로 하며 ’의도적으로‘ 느리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와 제약산업은 항공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느리게 발전하는 또 다른 분야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인명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기술 도입으로 생기는 위험이나 공백이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항공은 일부러 기술 발전 속도를 조절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신중하게 도입을 결정한다. 관제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때에도 단숨에 바꿔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범 운영하고 수차례 관제사의 피드백을 받아 개선한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고 관제 절차를 바꾸기 위해서도 반복해서 해당 정보를 전파하며 전 세계 항공종사자에게 알린다. 번거로운 절차가 반복될수록,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항공의 느림보 철학이 믿음직스러운 항공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낸 대표적인 나라다. 무엇을 하든지 속도와 효율이 미덕이며 모든 일이 빠르게 처리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속도가 빠르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이 있는 고민과 철저한 준비가 생략된다는 위험이 숨어있다. 항공이 수십 년간 신중함과 느림보 철학을 견지하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느림은 결코 뒤처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말이다. 속도가 전부가 아닌 시대, 항공의 느림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정말, 더 빠른 게 더 나은 걸까?


•국민일보 오피니언란에서도 해당 기고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월 1회 연재)

<항공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51430058&code=11171477&sid1=col&sid2=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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