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진 Jun 22. 2020

표준 관제용어와 프리토킹, 그 사이에서

억양과 발음은 언제나 고민이야

자기 계발을 위해 회사에서 지원하는 영어 말하기 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늘 하는 관제업무는 영어로 소통하게끔 되어있기 때문에, 말하기 실력도 키우고 관제도 더 잘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프로그램의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다. 퇴근 후 집에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녹초가 된 몸으로 전화영어를 하는 것, 일주일 단위가 아닌 교대근무 스케줄에 맞추어 매번 수업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정말 귀찮을만한 일이었지만 그때에는 마냥 즐거웠다.


비슷한 무렵 초보 관제사였던 나는 고민이 생겼다. 주파수에 영어 원어민이 등장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관제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영어를 섞어가며 본인이 편한 대로 말하곤 하는데, 이게 잘 들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직 학부생이던 시절에 현장에 있던 선배에게 농담처럼 듣곤 했던 이야기인데 내가 이걸 실제로 겪을 줄이야. 하지만 조종사의 말이 이해 안 된다고 해서 마냥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프리토킹 시간이 시작되면 나름의 경력이 쌓인 지금은 다음의 순서대로 대처한다.

1) 녹음장비(VCCS)의 play back 기능을 통해 다시 듣는다.

2)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두세 번 더 듣는다.

3)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침묵과 *'SAY AGAIN? [다시 말씀해 주세요.라는 뜻의 관제용어]'을 통해 조종사에게 네 뜻을 이해 못 했음을 알린다.

4)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단어 위주로 듣고 무슨 뜻인지 대충 유추해서 응대한다.

5) 바쁜 상황이 지나면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이해될 때까지 play back 한다. 마침내 깨닫는다!


재밌는 건, 나는 못 알아들어도 같이 근무하는 감독관제사는 귀신같이 알아듣는다는 것. 이해 못 한 채로 갸우뚱하고 있으면 '이런 뜻 아냐?'라고 곁에서 은근히 힌트를 준다. 아마도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경력이 쌓여 센스가 된 것이겠지. 그런데 어마 무시한 능력치를 갖고 있는 감독관제사도 이해 못 하는 영어가 가끔 튀어나오기도 한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예시는 이거다.

 -교차 유도로 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견인 항공기와 미국 국적의 항공기가 있었다. 관제사는 그 미국 항공기에게 **'GIVE WAY TO TOW TRAFFIC AHEAD OF YOU. [전방의 견인 항공기에게 진로를 양보하십시오.라는 뜻의 관제용어]'라는 지시를 줬다. 조종사가 되묻는다. 'ROGER.... YOU MEAN, THE TRAFFIC IN ______?'


영어 듣기 평가 시간을 방불케 하는 조종사의 말 덕분에 나를 포함한 관제탑의 인력들은 잠시 침묵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관제용어가 아니었던 탓에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었냐며 다들 정신없어했다. 그 사이 조종사는 지시를 눈치로 잘 알아듣고 제대로 진행했고 이후에 우리는 play back이라는 알짜 기능을 통해 조종사의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열댓 번 이상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YOU MEAN, THE TRAFFIC IN ______?”

in까지는 들리는데 뒤쪽의 단어가 무엇이냐에 대해 심층 토론이 이루어졌다. 지시가 traffic ahead였으니 in front가 아니었을까 라는 의견, 도저히 모르겠다는 의견들이 관제실 내부를 떠돌았다. 그리고 열심히 반복 듣기 한 결과 알아챘다. 빈칸의 단어는 'tow'였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그리고 얼마나 내가 표준용어에 갇혀 관제하고 있는지 느꼈다. 똑같은 단어의 순서가 바뀌고 가운데 전치사가 살짝 들어갔다고 아예 알아듣질 못하다니. 영어 듣기엔 그래도 자신이 있었는데 그건 진짜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원어민 조종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국 토박이인 내 영어 발음과 억양이 어렵다. 일단 문제는, 원어민이 구사하는 영어 억양과 한국 사람이 구사하는 영어 억양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예시로 'HOLD SHORT OF DELTA. [D유도로 진입 전 정지하여 대기하십시오.라는 뜻의 관제용어]'라는 지시를 우리는 'HOLD (short) oF delTAA.'라는 억양으로 발음한다. 하지만 조종사들이 구사하는 억양으로 들어보면 정확한 발음은 'hold SHORT of DELta.'인 것이다. 세게 발음하는 부분이 거의 반대다 싶을 정도로 다르다. 가끔 다시 말해달라는 요청을 들으면 여지없이 이런 고민이 생긴다. 내 영어 억양에 문제가 있는 건가, 바꿔야 하는 걸까. 혼자서는 답을 낼 수가 없어서 전화영어를 함께하는 캐나다인 선생님과 이 고민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네 억양과 발음 정도면 알아듣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다. 그게 수강생을 위한 선의의 위로는 아니었을까? 언제쯤이면 모든 국적의 조종사가 알아듣기 쉽도록 발음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