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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Jun 16. 2020

항공교통관제사

초보 관제사의 push back and engine start up

공항과 비행기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하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가족끼리 둘러 앉은 탁자에서, 그 때엔 이미 가정주부셨던 어머니가 한창 젊을 20대엔 어떤 일을 했었는지 아버지는 신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운을 떼시길, 저희 어머니는 약 30년 전 김포공항으로 출퇴근을 했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엄만 무슨 일을 했어?"
묻는 초롱초롱한 눈의 어린 딸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뭘 하긴. 비행기가 막 날기 전에, 날기 쉬우라고 뒤에서 비행기 꽁무니 밀어줬지!"
당시엔 엄마가 왜 배꼽을 잡고 웃으시는지 몰랐죠.

그게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머리가 한참 더 크고 나서였습니다. 비행기 엉덩이 밀어주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김포공항에서 젊은 날의 청춘을 지낸 어머니 모습이 그대로 이어지듯, 이제 다 큰 딸은 어머니 그림자를 기억하며 매일 인천공항으로 출근합니다. 아쉽게도 그네 밀듯이 비행기를 밀진 않지만요. 대신 하늘을 보며 삽니다. 제 또 다른 이름인 '소진'은, 짓고 보니 어머니 성함인 '서진'에서 비슷하게 따 온 모양이 되었습니다.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요? 활주로에서 달려가는 비행기를 뒤에서 밀어주었던 어머니 덕에 저는 하늘에서 살며 글을 쓰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운명에 이끌려 이 브런치북을 손에 쥔 당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오길 마음을 가득히 담아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 이 책은 곧 이륙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눈 두어 번 비빈 것 같은데 입사 4년이 다 되어간다. 푹푹 찌도록 더운 여름날, 흰 블라우스에 검정 슬랙스만 입고 바쁘게 청사 계단을 오르내리던 햇병아리는 이제 관제탑에서 겨우 혼자 몸을 가누는 병아리 정도는 되었다. 비행장에서만 살짝 맛 본, 그 관제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실습 경험을 가지고 관제사 자격증이 있다며 당당하게 타워에 올라왔던 스스로의 모습이 기억난다. 막상 관제석 앞에 서니 하루에 1,300편의 비행기가 오가는 인천공항의 분주함이 눈 앞으로 실감나게 다가왔었다. ‘내가 저 큰 비행기를 통제하는 거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도 모두?’라는 생각에 관제석 마이크를 잡는 게 두려웠다면, 이제는 주파수로 날 부르는 목소리에 자동으로 응답하는 자세를 취한다.


엄마가 지은 밥 냄새가 날 것 같이 노을지는 인천공항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관제사가 내 강렬한 꿈은 아니었다. 나는 법이나 정치, 행정학이나 경제학 따위를 공부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면 국문을 전공하고 옛 한글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었다. 교과서를 손에 쥐던 그 오랜 기간 동안 상상조차 못했던 항공이라는 분야에 나는 몸 담고 있다. 반드시 졸업 전 취직하겠다며, 독기를 품고 준비했으면서 정작 우리 회사 최종 합격 후에는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나보다 내 일을 더 바랐던 다른 학생들이 떠올랐다. 최종 면접까지 같이 올라왔던 같은 학과 동기들을 밟았다는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좋든 싫든 내 인생의 배경이 될 항공이다. 푸른 하늘이다. 수많은 비행기다. 그 가운데 우뚝 선 타워가 나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막 입사했을 때, 그러니까 2019년 가을 즈음의 우리 공항은 연일 일일 교통량 및 승객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Flight Radar24 어플에서 보이는 한반도는 *샛노란 비행기 모형으로 육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덮여있었다. 훈련 관제사인 내가 맡았던 그 피크타임들은 늘 버거웠다. 나는 왜 자꾸 말실수를 하는 걸까 고민도 자책도 많았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킬이 늘어가는 게 느껴졌고, 그 주파수 안에서 여러 비행기와 인사를 나누는 것이 행복했다. 시끌벅적해서 가끔은 정신없기도 하다가도 해낸 뒤의 마음은 뿌듯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같이 집으로 향하는 승객들을 보면 혹시 내가 관제하는 비행기를 타고 왔을까, 저 비행기를 내가 잘 안내했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바이러스가 퍼졌다.

코로나-19라는 이름의 질병은 전 세계 공항의 생태계를 파괴했다. 일 1,300편에 육박하던 항공편이 약 300편 정도로 줄어들었다. 운항편수는 60%정도 감소하는데 그쳤지만 여객은 무려 98% 이상이 줄어 영종도에 위치한 이 곳을 과연 공항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갑게 삼삼오오 놀러오는 여객과 꼬리를 물고 줄을 서던 비행기가 자취를 감추어 많은 공항 가족들이 회사를 그만 두거나 다른 일을 구해야만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무슨 뻔뻔함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죄책감마저 들었다. 관제사로서의 내 스킬은 이제 겨우 후방견인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비행허가부터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덮여있던 샛노란 비행기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참 잘했어요!’ 스티커마냥 지도에 띄엄띄엄 나타나고 있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많은 항공사들이 하늘길 복구를 시작했다. 바쁘게 하늘에서 유영해야 하는데 마치 죽은 것처럼 공항에 가만히 내려앉아있던 비행기들이 이제는 다시 바쁘게 날아다닌다. 내가 얼마간 봐왔던 공항의 모습은 생기가 없는 흑백의 모습이었는데,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의 항공사, 지상조업, 검역소, 각종 식음매장의 직원들이 온통 무지개를 그리며 인천공항을 그 예전의 모습처럼 선명한 색채로 수 놓고 있다. 내 흑백 세상이 서서히 컬러가 되는 게 아직 조금은 어색하기만 하다.


승객이 많아야지만 공항에서도 A380의 멋진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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