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키우고, 말은 좀 더 빨리 해 봐."
관제사는 어떤 포지션에서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을 따기 위해 훈련 관제사로서 반드시 교육을 받는다. 훈련 관제사가 마이크를 잡는 경우에는 비상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감독 관제사가 바로 옆에서 상황을 모니터한다. 단독근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항상 교관님들과 같이 근무했던 그 어느 날에는 이런 조언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목소리가 작다. 원래도 빵 터지도록 웃는 경우에만 데시벨이 무지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서는 특히 더) 작게 이야기하(게되)는 스타일이다. 마스크를 쓴 이후로는 내 반경 1m보다 먼 거리에서 나와 대화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나에게 응? 뭐라고?라고 되묻는다. 그러니 코로나가 시작되고 마스크를 필수 착용하면서부터는 목으로 먹고사는 직업인데 말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드니,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가 난감해졌다. 관제할 때 특히, 조종사가 내 말을 잘 못알아들으면 이게 성량이 작아서 그런가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말도 좀 느렸다. 이제는 익숙하게 용어를 사용하니까 바빠진 경우에 관제하는 속도를 높이기도 하지만, 능숙하게 근무하는 다른 교관님들이나 선배 관제사들과는 좀 비교가 됐다. 하지만 지금도 말하는 속도를 높이면 발음이 뭉개지는 경향이 있어서, 내 관제에서 '속도'와 '발음의 정확성'은 비례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고 아직도 생각하곤 한다.
일단 목소리가 작으면 발음이 잘 안 들리기도 하니, 당연히 성량을 키우는 게 옳다. 근데 관제할 때 말은 왜 빨리 해야 할까?
'내가 주파수를 점유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교통흐름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관제를 가르쳐주셨던 교관님은 관제용어를 최대한 짧게 쓰는 걸 좋아하셨다.
예를 들어, [항공기의 이동 순서를 정하는 경우]에 관제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어떤 유도로 앞에 정지하라고 지시한 후, 항공기끼리 분리가 완료된 후 이동하라고 재 지시한다.
ex) "Hold short of R3." > 분리 완료 후 > "Continue taxi via R7, R1, Gate 17."
2) 이동 경로를 한 번에 전부 주면서 어떤 항공기에게 길을 양보하라고 지시한다.
ex) "Taxi via R7, R1, Gate 17. Give way to 737 on your left from R2."
이런 경우에는 말을 한 번만 해도 되는 2번을 선호하셨는데, 바쁜 경우에는 특히 2번의 스킬이 교통을 빨리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는 이런 사례도 있다. [조종사가 관제 지시를 재확인하는 경우]에 관제사는 또 두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1) 지시를 전부 다시 확인해주면서 맞다고 긍정하는 경우.
ex)"Affirm. Taxi via A8, R8. Hold short of M."
2) 간단히 맞아요!라고 긍정하는 경우.
ex)"Affirm."
이런 경우, 1번처럼 이야기하면 조종사가 맞게 얘기했는데 굳이 왜 다시 똑같이 말해주냐면서, 그냥 2번처럼 짧게 대답하고 끝내라고 하셨었다.
여기에 짧지만 어떻게 보면 길 수도 있는 내 관제 경험을 더해서 이야기하자면, 관제사는 관제할 때 '발표하듯이' 말해야 하는 것 같다. 목소리는 크게, 발음은 정확히, 말은 적당한 속도로. 진짜 발표 대회에 나간 것처럼 강조해야 하는 부분은 끊어서 더 크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매일매일 12x.xxx이라는 주파수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발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근데 이건 좀 주관적이고 정량적이지 못한 내 생각이고, 나라에서 어떻게 발표해야 하는지 규정한 문서도 있다.
<무선통신매뉴얼>이라는 국토교통부 고시에서는 주파수로 교신하는 경우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국토교통부 고시 <무선통신매뉴얼>
2.2.1 다음의 송신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송신내용을 정확하고 만족스럽게 수신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c) 정상적인 대화 음성으로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한다.
d) 말하는 평균속도는 분당 100 단어를 초과하지 않도록 유지한다. 수신자가 전문을 받아 적어야 하는 경우에는 조금 천천히 말한다.
e) 음량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f) 숫자 전후로 약간의 간격을 두면 수신자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g) "어(er)"와 같은 주저하는 용어의 사용을 피한다.
j) 교신 전에 송신 스위치를 충분히 눌러야 하며 송신이 완료될 때까지 스위치를 놓지 않음으로써 내용 전체가 확실하게 송신되도록 하여야 한다.
a부터 여러 가지 항목이 쭈욱 나열되어 있지만 특히 훈련 관제사로서는 위에 쓰여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가끔은 네 발음을 네가 직접 들어봐라 하는 뜻에서, 교신 장비의 재생 버튼을 눌러서 녹음된 내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귀신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영 어색하고 창피해서 듣기가 좀.. 부끄러웠다. 문득 통화 녹음을 재생했는데 이게 과연 내 목소리라고...? 하는 당황스러운 경험이 있는 것처럼, 관제 녹음도 똑같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발표하는 것처럼 말해야 하는 전체적인 관제 법칙보다는 아직도 숫자 'three'의 발음이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신경 쓰이긴 한다. [뜨뤼]냐 [뜨리]냐 [트리]냐 [쓰리]냐인지는 여러 번 실험해보고 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