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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20. 2024

일곱 시간을 대화해도 부족했던 특별한 만남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찾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서

※ 본 내용은 시리즈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전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프롤로그를 보고 와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글자를 누르면 이동합니다 :)




저 치앙마이에서 돌아왔어요. 같이 밥 먹어요.



그와 다시 연락한 건 준비하던 책의 출간이 마무리된 후였다. 크라우드 펀딩을 한다는 소식은 전하지 못했었는데 그는 말없이 후원자 명단에 들어있었다. 한창 책들 사이에 파묻혀 포장 작업을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래서 출간 작업까지 마무리되면 보자고 한 거구나. 괜히 고마웠다.



프로그램에서 좀더 대화를 많이 하고 시간이 잘 맞았던 한분까지 셋이 모이기로 했다. 12월의 끝이 다가오는 굉장히 추운 날씨의 저녁이었다. 그가 좋아한다는 고깃집 앞에서 우리 둘이 먼저 만났고, 둘이서만 저녁을 먹었다. 다른 한 분이 비건이라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걸 까맣게 잊은 탓이었다. 오히려 자신은 늦을 것 같다며 미안해하지 않는 게 자신을 존중해주는 것이라며 배려해준 그분 덕분에, 우리는 애써 생각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나는 비계 부위를 전혀 먹지 않는다. 그래서 삼겹살만 전문으로 하는 집은 가지 않는 편이고, 혹여 삼겹살만 파는 장소로 모임을 가게 되면 냉면이나 김치찌개 등으로 배를 채우는 편이었다. 사실 나도 그가 좋아한다기에 셋이 먹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온 것이었는데. 둘만 남은 상황에서 그가 불편해할까 싶어서 더 많이 떠들었다. 따로 만난 그는 말수가 꽤 적었다. 덕분에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열심히 떠들었고 그게 또 즐거웠다.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이야기를 듣던 그는 접시 속에 떼어둔 비계를 발견했다. 비계는 안 먹지만 괜찮다며 말하는 나에게 자신도 괜찮다면서도 모든 고기를 하나하나 잘라주었다. 비계라고는 일절 없는 깔끔한 상태의 고기로. 왼손잡이인 그에게는 가위가 헐거워 자세는 엉성해보였지만, 잘린 단면은 확실히 나를 생각한 것이 느껴지는 깔끔한 살코기였다.



애써서 잘라줬는데 비계가 남아있으면 참고 먹어야 하나, 라는 다소 불경한 생각까지 했던 나는 반성했다. 그리고 이내 즐겁게 식사를 재개했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고 이야기는 정말 재밌었다. 둘이서만 만나는 건 처음인데도 고깃집 안이 훈훈한 탓이었을까, 어색함이라곤 전혀 없이 즐겁기만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 2차에서 모두가 모였다. 수많은 대화가 오갔고 둘이서 한창 달궈둔 대화의 열기는 셋이되자 한층 더 불타올랐다. 함께 만난 분은 대학원을 다니고 계셨는데 오랜만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니 살 것 같다며 즐거워하셨다. 약 2시간 가량 떠들었을까, 할 일이 많아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미안한 기색을 보이셨다. 자리가 이대로 파하나 싶었지만 일어나면서 두분은 자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지 말라며 떠나신 그 분. 어쩌면 그분 덕분에 우리가 만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둘이서 3차로 이동했다.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화하기에 술집보다 적당한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금요일 저녁의 서촌은 어딜가든 북적였고 시끄러운 틈새에서 이야기하는 건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을까. 어떤 주제를 가져와도 대화할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병원을 퇴사한지 일 년이 지났다고는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고, 이십 대 초반부터 약 10년 간 사회에 몸담은 그는 아는 게 정말 많았다. 업무 자체도 각종 사회 현상들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정보를 쉬이 해석하려 들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물밀듯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내게는 좋은 선생님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결국 4차로 카페까지 들렀다. 광화문의 할리스 커피가 24시간이었다. 술집에서와 달리 사람은 적었고 카페 안도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우리는 꿋꿋이 이야기를 나눴다. 1차 때는 신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마지막은 온갖 주제가 섞여있었다. 그날 우리는 오후 일곱시에 만나 새벽 두시까지 떠들었다. 연말이라 심야버스도 증차되었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더이상 목이 아파서 이야기하지 못하게 될만큼 떠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새벽버스 속 잔뜩 취한 사람들 사이에 몸을 구겨넣은 내게 그는 택시를 탈 거라고 했었다. 그러고보니 어디에 산다고 했더라? 뭐 잘 가시겠지, 생각했었는데. 그는 차도 끊겼고 걷고 싶은 마음에 2-3시간을 남양주를 향해 걸었다고 했다. 그리곤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한 분야에서 잘 맞을 수는 있어도 온갖 주제에서 대화가 잘 통할 줄은 몰랐다. 모르는 게 있으면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경험을 통해 아는 사람이었다. 천천히 묵묵히 찾으면 대부분 다 찾아진다며 웃는 사람. 모든 것이 다 참고 기다리면 결국에는 된다는 해결방식으로 귀결되던 사람. 친구는 없지만 가끔 만나는 몇이면 족하다며 웃는 그는, 모든 것에 초월한 것 같으면서도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앎만은 지극히 큰 사람이었다.



나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 같았다. 궁금한 것은 산더미이고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결해야 되고 참고 기다리는 것보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답변을 들어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다. 나를 비롯한 개개인의 사람에게는 관심이 많아도 사회 현상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화가 잘 통했을까.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더 만나보고 깨달았다. 



이 사람이 특별한 거구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든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거짓도, 가식도 필요없이 내가 가진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애초에 사람과 통하는 사람이니 대화도 잘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만남을 이어가던 우리는 이내 서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본 브런치북에서는 신랑과의 만남을 적어봅니다. 저희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을 글로 펼쳐내는 게 괜히 설레기도 하네요.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랄게요. 본 브런치북은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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