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아 Mar 28. 2022

[수필로 채색하다_1]
어느 바리스타의 오후

커피팩토리쏘_ 디지털 드로잉 © 彼我



어느 바리스타의 오후


彼我_ 作



3개월의 바리스타학교 정규수업을 마친 어느 날, 정말 우연한 계기로 잠깐이나마 바리스타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언젠가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일인지라 첫날은 기대감으로 새벽녘까지 살짝 잠을 설친 것도 같다.


하지만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을 경험할 때마다 찾아오는 두근거림과 설렘,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불안감은 첫날부터 나의 뇌에서 방을 빼야만 했다. 적지 않은 메뉴 레시피와 각종 재료들의 보관 위치부터 일의 순서와 저마다 다른 도구 사용법까지 서로 먼저 입주하겠다고 나의 전두엽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에 한계란 없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야말로 명언이라고 한 대 톡 쏘아붙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삼일 후, 나는 또다른 명언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옳았다. 내 사전에 불가능한 일은 없더라. 혼자서 카페를 찾는 손님을 응대하고 주문을 받아 커피와 디저트 메뉴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부딪치자, 숨어 있던 모든 잠재능력(?)이 살아났다.


물론 그 동안의 사회생활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내 나름의 업무 매뉴얼을 정리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반복해 읽고, 출근하자마자 그날의 커피 원두와 디저트 재료, 도구들의 위치와 사용법을 점검하고, 처음 접해 익숙치 않은 포스기를 이것저것 반복해 눌러보며 손에 익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질문하는 자세! 레시피를 봐도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일을 하면서 궁금한 점이 생길 때마다 관리자를 통해 수시로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초보 바리스타의 실수를 줄이는 지름길이다.


닷새쯤에 접어들자 모든 것에 익숙해지면서 그제서야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카페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차와 행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카페로 발걸음을 향할지 어림짐작을 해보는 여유도 생겼다. 일을 하는 시간대가 한낮부터 저녁이 되기 전까지의 오후라서 그런지, 하루의 시작을 커피로 일깨우려는 손님들이 많은 이른 아침에 비해 비교적 수월했던 것도 같다.


바리스타가 되어 일하는 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은 카페를 찾은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였다. 포스기 입력이 익숙치 않아 버벅거리던 첫날, 시크한 표정으로 전임자의 일처리 방식을 넌지시 일러주던 단골손님부터 떨리는 마음으로 제조한 음료가 맛있다고 함박웃음으로 리액션해주던 손님, 일행을 기다리며 카페 인근 마을의 변화상황을 설명해주던 손님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주제와 화법으로 카페의 오후를 채워주곤 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가족과 함께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다. 연세 지긋한 아버지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던 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근처에 위치한 코인 빨래방에 빨래를 돌려놓고 추위를 녹이기 위해 카페를 찾은 부녀였는데, 딸이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하며 다정하게 생강차를 권하고 말을 거는 아버지와 무심한 듯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그 모습에서 평소 친정아버지와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과 함께 온 붙임성 좋은 성격의 젊은 엄마 손님도 기억이 난다. 달콤한 음료가 먹고 싶은 딸과 카페인이나 당분이 많이 들어간 음료는 피하고 싶은 엄마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마치 허물 없는 친구사이처럼 느껴졌다. 마스크 아래로 슬며시 웃음짓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이 훅 들어온다.


"초코 음료에도 카페인 성분이 들어있지 않나요? 달기도 많이 달고."

"하..하하...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쵸? 얘얘, 거봐! 커피나 초코 음료 말고 몸에 좋은 것 좀 마셔."

"아이, 엄마는 참 그럼 맛이 없잖아!"


이럴 땐 중학생 딸을 달래며 엄마 편을 슬그머니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다. 나 역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이유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종 결정 권한은 지갑을 여는 사람에게 있는 법(?)이다. 나름 타협점을 찾은 후 카페를 나서는 모녀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멀리 떨어져 사는 예쁜 조카딸 생각이 났다. 언젠가 그 아이도 저렇게 커서 나와 티격태격하며 물건을 고를 날이 오겠지.


날이 저물어가면서 오후 영업을 끝낼 때쯤 카페를 찾은 아들과 어머니 손님도 있었더랬다. 키가 어머니보다 훌쩍 큰 잘생긴 청년과 중년의 어머니였는데, 어머니가 드실 음료를 신경쓰며 주문하는 모습이 참 훈훈해 보였다. 그리고 그 훈훈함이 겉보기만이 아닌 속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함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모자의 다정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내가 청년이 주문한 찬 음료를 따뜻한 음료로 내주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아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지 않았어? 우리 애는 아이스 커피 아니면 잘 안마시는데."

"어머,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에요. 그냥 주세요. 날도 추운데 따뜻한 커피 마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좋죠."


퇴근 시간을 앞둔 나를 배려하면서 괜찮다고 신경쓰지 말라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청년이 빛나 보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덤으로 내 아이도 저렇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개인 사정이 생겨서 더 이상 바리스타 일을 하지 않게 된 지금이지만, 바리스타로 보내던 그 카페의 오후가 이따금씩 떠오른다.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타인을 통해 이해와 배려, 사람 사이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잔잔한 시간이자, 바쁜 하루를 보람으로 마무리하던 그 시간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질 무렵 어둠이 어슴푸레 깔리기 시작하는 때를 프랑스 속담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개가 내가 키우는 개인지 나를 공격할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나는 그 시간을 '어느 바리스타의 오후'라 부르고 싶다.


창 밖으로 바삐 지나가는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게로 다가오는 이들은 누가 될까.

어느 새 나는 그 어느 날의 카페로 돌아가 앞치마를 입고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선 바리스타가 된다.


어느 바리스타의 오후를 꿈꾸며...

작가의 이전글 [시로 그리다_5] 피노키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