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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Jun 05. 2020

마흔에 대한 소문들

회상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는 시작점이 머지않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마흔이 두렵다. 두려워하지 않는 척했지만, 이제 적당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며 초연한 척했지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서른아홉의 마지막 날까지 마흔을 두려워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더 많은 것을 회상할 수 있도록 가열하게 기억들을 제조해내야겠다. 기억이 추억이 되는 것은 약간의 망각과 왜곡이 더해지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분이 든다. 젊음, 그 무엇보다 잃어버리고 나면 서글퍼지는 감투를 내놓아야 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서른다섯이 된 후로 주변의 40대 지인들에게 마흔이 불혹인지 물었지만 단 한 명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을 하는 나를 어쩐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을 뿐,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결국 마흔 이후의 삶은 어디에서도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었고 미리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제껏 얻은 자료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삼십 대를 낭비해버릴걸 그랬는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뻥을 친 건 아닐 텐데.. 하는 아주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어제의 대화를 듣다 보니 대학 때 이런저런 책들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소크라테스며 시지프스의 신화, 학번이 적힌 논어가 색이 누렇게 바랜 채 아직도 책장에 남아있다. 책 내용이야 막 대학에 입학해서 한껏 들떠있는 열아홉의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우습게도 책 표지와 각 과목별 교수님들 얼굴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가르치는 과목별로 교수님들의 스타일이며 성품도 꼭 그 과목과 비슷해서, 업이 삶과 잘 어우러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었고.

그중 논어강독은 한 학기 내내 나가서 읽고 무언가 말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와 생각나는 것은 늘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뿐이다. 전공책에 한자가 너무 많아서(아니 -에, -을, -이다. 빼고 전부 한자였어) 못 읽는 바람에 아빠가 전부 음을 달아주었던 일학년, 그때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서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시도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두꺼운 전공책 몇 장 줄 긋다가 분명 하겐다즈 녹차맛 아이스크림 떠먹으며 낄낄대고 밤이 되면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 앉았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이미 회상에 기대어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늘어놓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은 기억들이 밀려온다.

아, 하나 더. 어제 새롭게 얻은 자료에 의하면 마흔이 불혹이라 함은 불혹, 더 이상 타인을 미혹시키지 못함을 뜻한단다. 서글픈데 꼭 틀린 것도 아닐 것 같아서 적어놓는다. 아아,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누가 그랬더라, 타이밍도 절묘하게 지금 떠오르다니.  

대체 마흔 이후의 삶에는 무엇이 있는가, 결국 도달해보면 알게 될 것인데 나는 왜 이렇게 안달복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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