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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May 11. 2020

옷무덤에서 시작된 미니멀 라이프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원피스, 무릎 아래를 기분 좋게 스치는 스커트의 하늘하늘한 밑단, 바스락 거리는 셔츠의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리는 기분, 적당히 물든 데님의 빳빳한 질감이 입을수록 몸에 맞게 부드러워지는 것, 추운 날 보드라운 니트의 포근함, 잘 재단된 재킷이 어깨를 잡아줄 때,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코트의 윤기, 특별한 일 없이도 어쩐지 설레는 봄에는 화사한 색의 옷들이, 차분해지는 겨울에는 짙은 색 옷들을 선택하게 되는 기분.

한 사람의 취향과 날씨, 기분과 생각이 담기는 옷차림,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옷들이 있는지,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와요. 게다가 요즘은 손에 든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의 모든 브랜드, 유명한 디자이너, 온라인 쇼핑몰의 메가 히트 제품까지 순식간에 둘러볼 수 있어요. 터치 몇 번이면 그것을 손에 받아 들기까지 며칠 걸리지도 않고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소비를 자극하는데 도가 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쉽게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약점이기도 했어요.

교복을 벗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게 된 이후로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옷들을 샀었죠.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내가 구매한 모든 옷의 수와 금액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입이 떡 벌어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해요.

용돈을 모아서 하던 쇼핑에서 월급으로 주머니가 커지자 소비에도 거침없어졌어요. 매일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는 것과 함께 즐겨찾기 해둔 옷 쇼핑몰을 하나하나 체크하는 것도 잠들기 전 일과였죠. 한동안 옷을 사는 행위는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완전히 감정적인 소비였어요.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좀 우울하니까, 화사한 색의 니트 하나 정도 사보면 어떨까. 기분전환을 위한 스카프 하나쯤 나쁘지 않잖아. 특별한 날, 데이트를 위한 원피스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날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내 마음을 위한 것이었어요.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는 수고한 나를 위한 선물로 좋은 코트 한 벌 사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모든 옷에는 그것을 꼭 사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그래도 처음에는 고민하고 고심해서 딱 하나를 사려고 했던 것 같은데, 너무 간편한 결제방식과 습관처럼 굳어진 쇼핑몰 구경은 점점 이유가 필요 없는 소비를 하도록 만들었어요. 새 옷이 나왔네, 내가 좋아하는 색이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저렴하네, 나중에는 좋아하는 브랜드의 새 옷이 나오는 날을 기다리고 알람을 맞춰서 구매하기에 이르렀죠. 그냥, 좋아하는 거니까, 사두면 잘 입을 거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색깔별로 여러 개를 사는 일도 늘어났어요.

옷장은 가득 차기 시작했고 걸어둔 옷들은 서로 눌려서 구겨지기 시작했어요. 한벌만 걸어둔 옷걸이가 없었고 몇 개를 겹쳐서 걸어놔야 했죠. 접어서 서랍에 넣어둔 옷들은 기억 속에서 잊혔고, 한번 입고 깊숙이 넣어둔 옷들, 심지어 한 번도 입고 나가지 않은 채 옷장 안에서 잠드는 옷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통장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무거워죠. 분명히 옷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어쩐지 출근길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르는 일이 즐겁지 않았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운명적인 그 옷은 아직도 사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방 한쪽 벽면의 붙박이장과 서랍이 가득 차고, 꽉꽉 눌러 담은 옷으로 가득 찬 박스가 베란다 창고 한쪽에 쌓이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기계적으로 적어오던 핸드폰 속 가계부 어플을 켰어요. 결제하면 자동으로 기입되는 어플 안에는 최근  일 년간의 소비가 고스란히 담겨있었죠. 한 달씩 넘겨보며 눈 앞에 보이는 숫자가 믿기 힘들어서 몇번이나 다시 봤어요. 한 달에 최소 백만 원, 그 이상의 금액을 옷과 교환하고 있었거든요.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 옷장과 서랍, 베란다에서 구겨진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것들을 위해 일 년간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사라지게 했다니. 택배가 도착하고 하루 이틀 기쁘고 나면 곧 이미 가지고 있던 옷들과 같아져 버리는 물건을 위해, 이렇게 큰돈을 써버렸다니, 허무하고 화가 났죠. 그 돈이었으면 가고 싶었던 나라를 두세 군데쯤 더 다녀왔을 텐데. 만약 여행을 다녀왔다면 그 기억과 기쁨은 영원히 내 안에 살아있었을 텐데.

그때 경험이 아닌 물건을 소비하는 일은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피부에 와 닿았어요. 물론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들이 있고 마음에 꼭 드는 잘 만들어진 옷은 오래도록 나를 기쁘게 해 주죠. 하지만 과거의 저처럼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소비는 그저 남는 것 없이 통장을 가볍게 만드는 행위일 뿐이에요. 부록으로 좁아지는 집과 죄책감, 정리정돈에 쏟아부어야 하는 에너지의 낭비까지 감수해야 하고요.

그날, 산더미처럼 쌓인 옷들로부터 미니멀 라이프가 시작되었어요. 가장 먼저 일 년간 입지 않은 옷들을 과감하게 추려냈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괄 판매했죠. 그다음은 한 번쯤 입었던 옷들과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번거롭지만 중고거래도 해보고 선물도 하고요. 여기서도 크게 망설이지 않았어요. 같은 디자인으로 여러 개 있는 옷들은 한 가지만 남겨두고 전부 정리했어요. 보풀이 난 것, 드라이 맡겨야 하는 것들도 비워냈어요. 그렇게 전투적으로 일 년쯤 비우고 나서야 베란다의 박스가 다 사라졌어요.

이제 남은 옷들은 꽤 마음에 드는 것들이었지만 여전히 너무 많았어요. 내 몸은 하나뿐이라 하루에 한 번씩 입어도 계절에 맞춰서 다 입을 수 없는 숫자였죠. 한동안 매일 밤 가족들이 다 잠들고 조용해진 새벽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거울 앞에 서서 옷장의 옷들을 한벌씩 다 입어봤어요. 최대한 잘 어울리는 코디로 맞춰서 한 벌 한 벌 입고 거울 앞에 섰어요. 지금 체형에 불편함이 있는 옷, 어쩐지 얼굴을 칙칙해 보이게 하는 옷, 그냥 옷장에 두고 싶지 않은 옷,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조금이라도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옷들을 비웠어요.


목표는 옷장에 지금 계절의 옷들을 걸어서 보관하는 것, 겹쳐서 걸지 않는 것. 그렇게 몇 년간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은 옷들이 구겨지지 않는 옷장을 갖게 되었어요.

스마트폰에 결제할 수 있는 앱은 모두 지웠고 카드결제도 이용하지 않아요. 매일 쇼핑몰을 들여다보지 않고 가끔 생각나서 구경하다가 마음이 흔들리면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옷장 정리를 해요. 한두 시간 옷장 정리를 하다 보면 아직도 많은 옷들이 마음에 걸려서 사고 싶단 욕구가 사라져요. 관리하기 어려운 옷들 사지 않아요. 나와 일상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입는 옷들을 고이고이 모시고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결국 자주 입는 옷들은 정해져 있잖아요, 우리. 그 옷들만 있으면 되더라고요. 새로운 옷은 계속 등장할 거예요. 나는 오늘과 내일이 다를 거고요. 어떤 아름다운 옷도, 물건도,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미리 쌓아둘 필요 없어요. 아무리 좋은 것도 매일 사용하지 않는다면 없는 것과 같아요. 옷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치트키가 아니라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생필품일 뿐이죠. 이젠 유행하는 아이템, 유명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옷으로 옷장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매일 아침 여유 있는 옷장 앞에 서서 편안한 마음으로 골라 입은 옷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때, 기분이 좋거든요.



올해는 남은 기간 동안 옷을 사지 않는 것에 도전해보려고요. 코로나 때문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서 더욱 시도해볼 만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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