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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Apr 29. 2020

살 빼서 입을 거야, 뻥치지 말자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 정말로 믿고 있나요?

너무 많은 것들이,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워 삶의 숨통이 조여 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에, 비우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되었어요. 처음엔 물건을, 그다음에는 마음을, 그리고 결국은 삶 자체를 정리 정돈하게 되었죠.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

한참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참 많이 읊조리던 말이었어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여태껏 오랜 시간을 사용한 적 없지만) 언젠간 필요할지도 몰라. 이 마법 같은 말 한마디면, 비우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꺼내 들었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다시 수납장 구석에 자리한 그 물건들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 물건들은 이제까지 그랬듯이 순식간에 잊히고 말았어요.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딱히 생활에 필요하지 않으니 꺼내 쓰지는 않게 되는,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 자매품으로는 '살 빼면 입을 거야'가 있고요.

두 가지 말은 모두 미래를 시점으로 하는 말이에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오지 않은 순간, 실은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해 '지금'을 불편하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않게 하는 말이죠.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무르는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져요. 살 빼서 입겠다고 걸어둔 옷들은 몇 년째 유행을 지나가고 어딘지 촌스러워지죠. 나이가 달라짐에 따라 취향도 미묘하게 달라지고 체형도 바뀌는데 살을 뺀다고 해도 그 옷이 처음 샀을 때처럼 매력적일 것 같지도 않아요. 하지만 옷장 안에 한자리 차지하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우리는 몸과 마음을, 좀 더 '지금'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미래를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과거를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에요. 간단히 숫자로 나눈다면 지금, 현재를 7, 미래를 2, 과거는 1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단호하게 말하자면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언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완벽하고 안전한 미래라는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몇 년 전 이사를 하고 방 정리를 하다가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안에는 아주 오래된 핸드폰과 충전 케이블, 컴퓨터 전원,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전선들과 이젠 어디에 사용할 수 도 없는 것들이 담겨있었어요. 몇 년 주기로 자연스럽게 교체하게 되는 전자제품들, 특히 이젠 일상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핸드폰과 컴퓨터, 노트북, 이런 제품들의 소품들이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물건을 바꿀 때마다 잘 모아두었던 거죠. 그러나 한 번도 이렇게 담아둔 것들이 필요한 적은 없었고 그대로 잊혀서 이렇게 쓸 수 없는 시점에서야 우연히 발견된 거고요.

특별한 날 꼭 입고 싶은 마음에 샀던 고가의 실크 원피스는 결국 한 번도 입지 못한 채 옷장 안에서 몇 년간 잠들어있었어요. 어느 날 그걸 발견하고는 이미 작아져 버렸지만 그걸 구매할 때의 마음과 들인 비용이 아까워 한 번 더 옷장 깊숙이 걸어두었죠. 그리고 또 몇 년 뒤, 여전히 사이즈도 맞지 않고 어쩐지 묘하게 촌스러워져서 결국은 앞으로도 입을 일이 없겠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비단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비슷해요. 어떤 계기로 친해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죠. 혹은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이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작은 기쁨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모임에 나가 얼굴을 비추고, 마음이 불편해도 웃는 이모티콘을 써가며 약속을 잡아요. 언젠가 이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언젠가 이 모임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묘한 미련 때문에 지금의 불편함을 모른척해요. 심지어 자신이 소모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관계가 내게 꼭 필요해지는 순간, 진실한 도움을 건네는 순간, 온 적이 있었나요? 오히려 이런 불필요한 관계나 무의미한 타인들을 비워냈을 때, 진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겨요.

상자 안에 담긴 정체모를 물건들을 비웠어요. 그 상자마저 재활용품으로 버려내고 그 자리를 깨끗하게 빈 공간으로 만들었더니 공간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조용한 새벽, 혼자 거울 앞에 서서 옷장의 모든 옷들을 하나씩 입어보며 아름답지 않은 옷, 어울리지 않는 옷, 몸에 맞지 않는 옷, 조금이라도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옷은 비워냈어요. 이제 옷장 안에는 매일 입는 옷들만 걸려있어요. 몸에 걸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옷들이요.

메신저 목록에 뜬 수많은 이름들 중 그저 '아는 사람'으로만 분류되던 이름들을 비워냈어요. 엄지손가락만 바쁘게 만들었던 불필요한 이름들이 사라지고 나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더 자주 건넬 수 있게 되네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아쉽거나 그때 비운 것들이 필요한 순간은 오지 않았어요. 내 마음이 솔직하게 원하는 것들만 남겨둔 것들로도 삶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었으니까요. 몸과 마음, 공간에 생긴 여백들 덕분에 가진 것들을 살뜰히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요.

'언젠가는' 그 말은 단어의 뜻처럼 절대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에 살아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살고 있잖아요, 만날 수 없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지금을 낭비하지 않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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