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가 담아낸 '상생의 철학
노점과는 다르게 공간을 확보한 식당을 운영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손님들과 주고받는 밀도 높은 피드백이었습니다. 홀에서 손님들을 관찰하면서 느낀 놀라운 변화는 한식의 인지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빔밥의 뜻부터 먹는 법을 상세히 안내해야 했지만, 이제 손님들은 익숙하게 비빔밥 재료와 고추장도 섞고 젓가락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곤 합니다. 심지어 제철 식재료를 먼저 추천해 주는 현지인들을 보며 한식이 그들의 일상에 친숙하게 자리 잡았음을 실감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주제는 단연 ‘김치’였습니다. 김치가 2017년 영국 가디언지등에서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선정되고, 2020년 팬데믹 이후 면역력 강화식품으로 각광받으며 그 위상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손님들은 김치의 원산지는 물론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묻곤 했습니다.
당시 유럽 식품 산업, 특히 환경 의식이 남달랐던 북유럽의 화두는 단연 '식품의 지속가능 (Sustainability)'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치는 매우 우수한 대안이 됩니다. 육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온실가스와 비교했을 때, 채소 기반의 발효 식품인 김치는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현저히 적기 때문입니다.
최근 덴마크에서는 식품 과정 자체를 친환경적으로 혁신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농산물 재배 시 화학 비료를 줄이고, 발효 과정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저탄소 인증' 모델이 확산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덴마크 손님들의 김치의 원사 지를 물어보는 질문이 김치의 영양학적 효능에 그치지 않고 그 제조 과정의 윤리성까지 닿아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치는 이제 '푸드 업사이클링'의 핵심 동력으로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버려지던 배추 겉잎이나 무청 등이 이제는 김치 제조의 훌륭한 원료로 재탄생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는 것을 넘어, 식품 생산 과정이나 레스토랑에서 버려지는 식재료 속 영양소를 추출해 새로운 기능성 식품이나 소스로 개발하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식품 부산물을 자원화함으로써 환경오염을 막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순환 경제'의 표본이 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2018년, 노마(Noma)의 셰프 르네 레드제피가 발효 가이드를 통해 식재료를 보존하며 풍미를 극대화하는 지속가능성을 강조했을 때, 그 중심에 김치가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고민은 깊었습니다. 협소한 주방 환경 탓에 쏟아지는 김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한국에서 공수해 오는 김치만으로는 현지인들이 궁금해하는 '발효의 세밀한 과정'을 온전히 보여주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 현지 식재료로, 이곳의 엄격한 식품 안전 기준에 맞춘 우리만의 김치를 직접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저는 덴마크 식품 산업의 혁신이 모이는 CPH Food 콘퍼런스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소개를 하던 중, 뜻밖의 기회를 마주했습니다. 기관 관계자가 제 고민을 듣고는 현지에서 김치를 직접 개발할 수 있는 펀딩 프로그램을 제안받았습니다. 그렇게 'KIMCHI PROJECT'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EU 지역개발기금과 덴마크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체계적인 구조로 운영되었습니다.
목적: 북유럽 소매 시장을 겨냥한 프리미엄 김치 제품의 생산 라인 구축 및 시제품(3~5종) 개발
총예산 규모: 약 185,000 DKK (한화 약 3,700만 원)
대학 연구 지원비 (KU Food, DTU Food Lab): 125,000 DKK (한화 약 2,500만 원) 배정
기업 인건비 환급 (KOPAN): 약 60,000 DKK (한화 약 1,200만 원)
지원 방식: 현금 직접 지원이 아닌 '지식 및 인건비' 중심. 프로젝트 참여 직원의 실제 인건비 중 1/3을 환불해 주는 구조
전문 인프라 활용: 대학 연구진 인건비 및 실험실 사용료 포함. 고가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해 식품 안전 및 유통기한 연장 등의 기술적 장벽 해결
약 6개월간 코펜하겐 대학교 식품 연구진 및 DTU 푸드랩과 긴밀히 협력하며, 스칸디나비아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입맛과 엄격한 유럽 식품 안전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표준 레시피를 정립했습니다. 특히 발효 과학을 기반으로 최적의 유통기한을 확보하는 보존 기술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매장 내 안정적인 공급은 물론 정식 유통 허가를 통한 외부 채널 확장이라는 실질적인 비즈니스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김치가 건강식을 넘어 지속가능한 식품으로 재조명받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가진 '보존의 지혜'에 있습니다. 제철 채소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영양을 극대화하는 발효 기술은, 식량 위기와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난제 앞에 선 현대인들에게 가장 혁신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식탁 위의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익숙한 '반찬'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덴마크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본 한식의 가치는 전혀 달랐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식재료를 버리지 않고 긴 시간 저장해 온 고추장과 된장의 발효 미학, 그리고 채소를 데쳐 말려 보관하는 나물의 지혜는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윤리적인 식생활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발효의 생명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가 개발해 낸 '김치냉장고' 같은 보존 기술은 한식의 가치를 완성하는 정점입니다. 단순히 온도를 낮추는 것을 넘어 미생물의 숨결을 조절하는 이 기술력은, 한식이 단순히 '맛있는 요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지탱할 수 있는 고도의 '지속가능한 푸드 시스템'임을 증명합니다.
이번 김치 프로젝트는 식당을 운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 단순히 매출이나 메뉴를 고민하는 수준을 넘어, 한식을 바라보는 시야를 세계적인 지평으로 넓혀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낯선 땅 덴마크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하던 발효와 보존의 미학이 '지속가능성'이라는 시대적 화두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는 한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