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에서 내려 세상을 보다
2019년 1월, 저는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떠났습니다. 짐가방은 설렘보다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낯선 덴마크 땅에서 추위와 높은 물가를 어떻게 감당할지 고민이 앞섰습니다. 제 캐리어는 두꺼운 옷과 핫팩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한국식품을 당분간 접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즉석식품도 가득했습니다. 마치 유격 훈련을 나서는 이등병 같았습니다.
14시간 넘는 비행 끝에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의 첫인상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았고,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북유럽의 평화로움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죠. 하지만 그 평화는 잠시, 입국 심사대로 향하자마자 알 수 없는 '느림의 영역'에 진입했습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공항이더니, 입국 심사 줄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했습니다. 입국 심사관이 여권을 검토하는 시간은 거의 장편 드라마를 보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차오르는 방광과 사투를 벌이며 다리 꼬기 올림픽을 홀로 치러야 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꼬면 잠깐 평화, 다시 풀면 위기! 그 긴장의 연속 끝에, 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느림의 미학'으로 하는 올림픽 경기가 있다면, 덴마크는 단연 금메달감입니다.
힘들게 입국심사장을 나와 공항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홀로 덴마크 공업대학교(DTU)까지 찾아가야 한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하지만 공항은 저에게 "서두르지 말고 긴장 풀고 가라"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높은 천장과 넓은 유리창 덕분에 자연광이 공간을 밝고 개방감 있게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표지판은 없었습니다. 단순하고 명확한 안내 표지판, 거리가 최소화된 직관적인 동선 덕분에 헤맬 염려가 줄었습니다. 온 사방의 직접 조명 대신 천장에 달린 간접 조명이 공간을 은은하게 비추었습니다. 저는 불안함 대신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막 건너온 제 몸은 경직되어 있었지만 덴마크에서 마주한 첫 공간은 도착 첫 순간부터 저에게 서두르지 않도록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짐을 찾고 출국장에서 나와 메트로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저는 가장 빠른 메트로를 타기 위해 습관적으로 닫힘 버튼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버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열림 버튼만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당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닫힘 버튼이 없는 것은 휠체어 사용자를 기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메트로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하려는 저의 몸은 여전히 가장 빠른 속도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짐가방을 끌고 버스를 타러 달렸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거의 영혼 이탈 직전에 도달했을 때, 제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을 본 버스 기사님은 저를 위해 닫힌 문을 다시 열어주었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기사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저는 곧바로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한참 이동을 하다 정류장에서 한 할머니가 타셔서 제 자리 쪽으로 걸어왔습니다."자리를 양보해 드려야지!"라는 동방예의지국의 DNA가 저를 조종해 벌떡! 일어나려던 순간, 할머니는 단호하지만 따뜻한 미소로 제 무릎을 '지긋이' 눌러 앉히셨습니다.
할머니는 제 발치에 쌓인 난민 수준의 캐리어 더미를 보시더니, 속삭이듯 한마디 던지셨습니다.
" Welcome to Denmark, Take your time." (덴마크에 온 걸 환영해, 서두르지 마.)
그 순간, 저는 멈칫했습니다. 서둘러 달려왔던 저의 모든 속도가 멈춰버린 듯했습니다. 제 몸에 남아있던 '입국 심사장의 분노'는 금세 사그라들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닫힌 문을 다시 열어 제 시간을 연장시켜 줬고, 할머니는 제 무릎을 눌러 제 삶의 속도를 리셋시켜 주셨습니다.
덴마크에서의 첫 여정은 '생존'이 아니라 '여유'의 순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버스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경직된 몸 대신 도시에 시선을 둘 여유가 생겼습니다. 덴마크는 국민소득 6만 달러에 육박하는 부자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창밖 풍경은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것은 고급 승용차가 아닌 평범한 자전거들이었습니다. 자전거의 압도적 비중은 도시 전체에 일종의 느린 속도를 강제하는 듯했습니다. 도시의 이동 속도와 긴장감이 현저히 낮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자전거가 차보다 더 빨리 가는 진귀한 풍경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의 모습 역시 낯설었습니다. 높은 고층 빌딩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낮은 건물들 속에 넓은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신호등은 마치 장식처럼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도심 한복판인데도 녹지 공간과 호수가 자주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자연이 도시 깊숙이 파고든 듯했습니다. 도로의 폭이나 건물의 높이보다 시민의 일상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날씨는 영하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야외 카페 테이블마다 두툼한 울 담요가 깔려 있었습니다. 손에는 따듯한 와인 혹은 커피잔이 들려 있었습니다. 저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더 가까이 붙어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그들은 계절의 추위를 껴안고 함께 하는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핸드폰을 보는 사람 없이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해 질 녘의 노을이 낮은 건물 위로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들에게 야외의 테이블은 하루의 짐을 내려놓고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학교를 찾아가는 길에 바라본 사람들은 돈이나 속도가 아닌, 스스로의 시간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속도와 덴마크의 시간' 그 대비 속에서 저는 비로소 이 낯선 땅에서 숨을 고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