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생각'은 점수가 없습니다
대학교 첫 학기를 시작했던 설렘처럼, 교환학생으로 시작한 첫 학기도 너무나 설렜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곧 시험 기간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긴장했습니다. 교환학기였지만 한국에서는 마지막 학기 학점으로 인정되기에 졸업 후 취업에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학생들과의 경쟁에서 제 위치를 확인할 기회였기에 좋은 점수를 받고 싶었습니다.
시험은 구술 평가로 진행되었습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메우기 위해 수업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시험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 노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나름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다는 자신감을 갖고 강의실에 들어섰습니다.
시험관은 두 명이었습니다. 수업 담당 교수와 처음 보는 다른 교수였습니다. 두 교수님은 번갈아 이론 질문을 했습니다. 시험 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수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학기 동안 배웠던 내용을 너의 생각대로 이야기해 보게."
예상했던 질문이었습니다. L과 R 발음에 힘주느라 혓바닥 에너지 소모가 컸지만 저는 연습했던 대로 암기한 내용을 차례차례 말했습니다. 두 교수님이 점수 논의를 하는 동안 저는 밖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저는 최소 7점, 아니 10점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은 점수는 기대와는 달리 '0'점이었습니다.
0점이라니, '0'앞에 '1'은 어디 간 거지? 빵점 소리에 저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참고: 덴마크 점수 체계
덴마크는 7점 척도를 사용합니다. 점수는 -3, 0, 2, 4, 7, 10, 1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2점부터 12점까지만 통과 등급입니다. 0점과 -3점은 낙제 등급입니다.
담당 교수님이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기본적인 수업 내용은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대답에는 "나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새로운 지식'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0점을 맞고 나니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종차별? 영어 실력 부족? 수업 시간 질문 부족? 온갖 이유를 떠올려봤습니다. 하지만 숫자 '0'은 공허함을 가져왔습니다. 단 한 번도 빵점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기말고사 체육 주관식 시험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입 안 부분의 맛을 느끼는 부위, 즉 '혀'를 답으로 써야 하는 칸 옆에 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시험 종료 10초 전에, 임의로 네모칸을 하나 더 그려 '메롱'이라고 썼습니다. 그때도 담임 선생님에게 창의성을 인정받아 0점은 모면했던 경험이 있기에 이번 점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0점 맞은 것은 쪽팔려서 같은 반 학우들에게는 말도 못 했습니다. 오히려 학우들의 점수를 듣고 열받았습니다. 그중 시험 전 날에도 클럽 다녀왔던 호주 친구는 교수가 한 질문이 어려워 대답이 어려울 때는 악센트는 더 강하게, 말 스피드는 더 빠르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고 자랑했습니다.
"너 점수 뭔데?" 물었습니다. 10점이랍니다. 헐, 십. 빵
결국 저는 이 분노를 삭이지 못했습니다. 슈퍼바이저에게 메일을 보냈고, 다음 날 찾아가 폭포수처럼 컴플레인을 쏟아냈습니다. 슈퍼바이저는 제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제 기분은 이해한다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구두시험은 주관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공 교수에게 학생들에 대한 선호도가 생길 수 있어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당 교수 외에 교육부에서 파견된 교수(Censor)가 동석한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센서'라는 말대로 공정한 점수의 검열을 위해 시험에 참여하고 저와 친분이 없으니 선호도가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결국 두 교수의 점수가 다르면 논의를 거쳐 점수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결정타였습니다.
제가 받은 두 점수는 '0'점과 '0'점, 평균도 '0'점이지만 '0'점보다 더 낮은 마이너스 점수도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 말라며 내 어깰 두드립니다. 다음번 시험에서는 수업을 이해하고 그룹 프로젝트하면서 새롭게 배운 내용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인생 최초의 '0'점을 기록하고 석사 수업 때 같은 과목을 재수강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 호주 친구가 저보다 '구술 평가의 특성'을 더 잘 이용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 친구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덴마크 교수님들을 상대로 영어 악센트를 폭발시켜 언어적 우위를 전략적으로 확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완벽하게 암기한 지식을 뽐냈지만, 덴마크 교수님들은 '나만의 새로운 지식'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암기해서 시험을 치르는 것에 익숙했던 제 모습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야만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덴마크식 교육이 제 안에서 충돌했습니다.
저는 마치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두 사람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