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下

by 포비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그저 말 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속삭였지만 결국 그 영원성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녀는 고양이를 닮은 귀엽고 청순한 얼굴에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다른 연인들과 조금은 달랐고 서로의 취향에 점점 익숙해져가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비싼 목걸이보다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을 더 좋아하던 그녀는 나에게 수많은 감정들을 가르쳐줬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보다 남이 중요해진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은 앞으로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사랑은 조금 특별했지만 그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길을 걷고, 학교 끝나고 만나 맥주 한잔 하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줬다. 바닷가로 여행도 떠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밤새 전화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참 좋았다. 수식할 수 있는 말들이 참 많겠지만 그냥 '좋았다'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는 관계였다. 짜릿함, 편안함, 재밌음, 설렘과 같은 어느 한 감정에 치우지지 않고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늘 사랑을 속삭였고, 그녀는 귀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담담하게 나에게 내뱉던 그날, 나는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그녀가 없으면 미칠 것 같고 드디어 찾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이렇게 잃고싶지 않았지만 너를 통해 경험한 그 모든 것들이 너무 값졌기에 나는 그녀를 그냥 보내줬다. 질척거리는 그런 전남친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제법 두려웠던 것 같다. 혹시 내가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한다면 그녀가 나와의 기억들 마저 그저 그런 순간들로 남겨둘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정말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는 사이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 참 미련한 생각이었다. 그녀를 웃으면서 다시 보고 싶어서 붙잡지 않았지만,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그녀와 헤어진 이후 나는 매일같이 우울함에 빠졌고, 무리해서 일을 하고 여행을 다니며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내 일상의 많은 것들에 그녀가 있었고, 내 정신은 거의 대부분 그녀로 이루어졌기에. 멀리 해외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있으면 '그녀랑 왔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보면 조금 울컥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녀너를 잊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갔던 가게를 내가 좋아하는 집이라고 친구들에게 웃으면서 소개할 수 있어졌고, 나에게 소개해준 가수의 음악들을 들을때 이제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보다 그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해도 그녀와 함께 왔으면 어떨까 생각했던 내가 이제는 어디를 가도 그 장소와 그 순간을 음미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잊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나에게 단순한 전여친 그 이상의 감정이었음은 분명하다. 모든 남자가 그렇든 첫사랑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연락이 오면 설레는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 여자가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를 만나면서 세상을 더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언제 행복한지 더 세심하게 알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 뿐이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로 얻은 것들로 다른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떤 여자를 만나든 그녀보다 좋아하고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강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이별을 말한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차마 그 말은 못하겠다. 그녀는 우리가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그녀를 그만 좋아하게 되면 그때야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아직까지도 나는 너그녀와 함께 노들섬을 걷고, 그녀의 집에서 그릭 요거트를 나눠먹는 꿈을 꾼다. 그녀는 나에게 이런 사람으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너가 나의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