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화학작용

by 포비

< >

”근데 두분은 무슨 사이에요? 사장님 남자친구?“ 바텐더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우리 잘어울려?“ 그녀가 말한다.

”아니에요. 저는 여자친구 있고 이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내가 술을 크게 한모금 마시고 답한다.

”잘 모르는데 둘이 술을 마시러 와요?“ 젊은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어쩌다가 몇 번 봤는데 이렇게 무작정 끌고 왔네요.“

”근데 잘생겼다. 사장님이 좋아할 만 하네요. 전에 말한 그 사람이죠?“

”딱 내 스타일이야.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그리고 어깨가 넓잖아.“

”저 여자친구 있어요.“

”누가 사귀재?“ 긴 머리를 쓸어 넘긴다.


가게에는 어느순간부터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어둡기만 한 줄 알았던 조명은 은은한 보라색을 작은 공간에 뿌리고 있었다. 속삭이는 것 같은 음악소리에는 구석에 앉은 커플들의 대화소리,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섞여있다. 매일 바쁘기만 한 일상 속에서 오랜만에 잠시 쉼표를 찍는 순간이다. 정말 오랜만에.


”오빠 담배 펴요?“

”네.“

”그럼 같이 피러 가요. 사장님 잠깐만 나갔다올게요.“

검은 셔츠를 입은 그녀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 밤은 조금 쌀쌀하네요.“

”그러네요.“

”몇살이에요?“

”27살이요.“

”여자친구는요?“

”25살이에요.“

”어디 멀리 갔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음.. 미워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허전해보여서?“

”교환학생 갔어요. 독일로.“

”엄청 멀리 갔구나. 저는 23살이에요.“

”학교 다녀요?“

”아니요 그냥 여기서 일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요.“

”연습생.. 뭐 이런건가?“

”그런느낌은 아니고 그냥 하고싶은거 하면서 살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기다리겠다. 이제 들어가요.“

”이거 마셔봤어?“ 다시 가게로 들어오니 그 여자는 바에서 술을 고르고 있었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은 듯 남색의 상자를 들고 다가온다.

”이거 집에 있어요.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셔서.“

”뭘 좀 아시는구나? 비싼건데 너니까 만원에 한잔 줄게. 어때?“

”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능숙하게 잔을 꺼내 따르기 시작했다.

아까 먹었던 칵테일 보다 더욱 직관적으로 알코올의 매운 향이 느껴졌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달콤한 향이 느껴지고 뒤로는 제법 익숙한 나무의 향이 느껴진다. 당황스러웠지만 어느새 그 향에 매료되어 입에 남아있는 향들까지 즐기고 있었다. 점점 취기가 오르고 있다.


”어? 나 저 책 좋아하는데. 읽어봤어요?“

”이거?“ 그녀가 내가 가리킨 책을 들고 온다.

”네. 되게 재밌는데 뭔가 좀 야해요. 그래서 더 재밌었나.“

”이거 내 책이야.“

”네?“

”내가 쓴 책이라고. 3년전에.“

”작가라고 한게 거짓말은 아니었나보네?“

”나름 유명하다니까. 나는 아니어도 내 책은 좀 유명해.“ 그녀도 술을 많이 마셨는지 조금 풀린 눈으로 답한다.

”또 뭐 있어요?“

”우리집에 많은데, 보러갈래?“

”됐어요.“

”웃네. 이제 좀 친해졌나봐 우리.“

”사장님같은 여자가 꼬시는데 안넘어오는 남자가 있네요?“ 새로운 손님들을 위한 칵테일을 만들고 온 바텐더가 말을 건낸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이길래.“

”사랑하는 사이에 명확한 이유가 어딨어요. 그냥 계속 보고싶고 안고싶으면 그게 사랑인거지.“

”그 여자는 부럽네.“

미묘한 조명과 음악의 변화로 바의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이 공간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가볼게요. 좀 취한 것 같아서. 계산할게요.“

”다음에 밥 사. 이제 그만 붙잡고 보내줄게. 잘가.“ 긴 머리를 다시 쓸어넘기며 나를 바라본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는다. 정말 오랜만에 걱정보다 즐거움이 우세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켜니 Y에게서 연락이 와 있다.


[ ]

오늘도 수고했어.


도서관에 도착해 J에게 문자를 남긴다. 지금 한국은 새벽 1시이다. 주변에는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이 매번 같은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나도 한국에서 올 소식을 잠시 기다리다 휴대폰을 덮고 책을 핀다.


사랑은 화학작용이다. 남녀가 처음 만나 서로에게 빠져들고 서로를 원하는 단계에서는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분비되고,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단계에 이르면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나온다. 이것들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섹스나 결혼으로 발전된다. 이때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뇌에 분비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를 기능적 MRI로 촬영하면 그들의 뇌의 쾌락중추가 활성회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호르몬의 영향으로 우리는 종종 이성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열정과 충동을 느낄 수 있다.

느끼는 감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의 부분도 다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정을 조절하는 미상핵이 활성화되고 유혹을 느끼는 사람은 전두엽의 피질부분이 활성화된다. 열정적이고 성적인 사랑은 후두엽의 피질들도 활성화시키고 친구같은 사랑은 측두엽의 피질이 자극되어 느끼는 감정이다.


휴대폰이 울린다.


도서관 도착했어? 나는 방금 와서 2층에 있어. 너 오면 연락줘


준호오빠의 연락이다. 답을 하려던 순간 또 하나의 연락이 온다.


술 한잔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야. 아마 바로 잠들 것 같아. 조금 늦었지만 좋은 하루 보내.


J의 답장이다. 어떤 술을 마셨을까. 누구랑 마신 것일까. 나랑 같이 가던 바에 간 것일까? 잠시 한국을 생각하던 중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는다.


"언제왔어?"


준호오빠가 내 옆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1시간 정도 됐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책들을 꺼낸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책을 펼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창밖은 황금색 하늘이 펼쳐져있고 짐을 챙겨 일어난다. 많이 덥지는 않으면서 선선한 공기의 냄새가 상쾌한 그런 저녁이다.


”이 근처야. 걸어서 한 15분정도?“

”네.“

”공부는 어때?“

”재미는 있는데 요즘 좀 집중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남자친구 생각?”

“그것도 좀 있어요. 평소에는 원래 매일 먼저 연락하고 답장도 빨랐는데 요즘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몸이 멀어지니까 신경쓰기가 조금 버거울 수도 있지.”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솔직히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떤 부분이?“

”한국에 있을 때는 같이 있는게 너무 좋고 행복했는데 여기서 공부하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니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확신이 잘 안서네요.“

”그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니고?”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닌데..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그런거야?”

“예전에는 매일 연락을 먼저 하고 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답장도 빨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텀이 조금씩 길어지더니 최근에는 연락을 하루종일 주고받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전화도 그렇고...”

“그 사람이 마음이 떠난건가?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럴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마음이 떠났다면... 그런데 더 이상한거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게 슬프지 않아요. 내가 많이 사랑한다면 이렇게 우리가 멀어진다는게 가슴이 찢어지고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야 하지 않을까요?“

”계속해서 제가 있을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것 보다 그냥 지금의 상황이요. 진짜 좋아하는 공부는 이곳에 있고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인생의 한 부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보다 저랑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이유모를 차분한 생각들에 쌓여 있었던 고민이 윤곽을 드러낸다. J는 참 좋은 사람이다. 멋진 외모에 부족하지 않은 배경, 다정한 말투와 여유로운 마음까지 완벽한 남자인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그와 떨어져 살아가다 보니 나랑은 조금 결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하고싶은 것을 하고 돈을 벌어 내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러나 J는 항상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맞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다르다. 그의 마음 속에 내가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내 마음 속은 이제 알겠다.


길을 걷다 보니 금방 식당에 도착했다. 테라스 자리에 그의 동료들이 4명 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감정과 생각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눈 앞의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


수, 일 연재
이전 09화9화. 드라이 마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