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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생활은 어때? 수업은 들을만 하고?“
”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좋아요. 이제 점점 날도 좋아지고 있고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렵지만 수업도 재밌어요.“
”여행은 좀 다녔어?“
”개강하고는 아직 안갔는데 다음주에 스위스 가려구요. 오빠는 여행 많이 다녀요?“
”작년에는 이곳저곳 많이 갔었는데 이제는 자주 안가.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까 욕심도 생기고 시간도 부족하네.“
”박사과정까지 여기서 할 생각이세요?“
”이번 여름에 결정할 것 같긴 한데 아마 그럴거야. 교수님도 좋으시고 주변 환경도 괜찮은 것 같아서.“
준호오빠랑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덧 햇살이 따스하게 찾아오는 하늘 아래 하늘색 셔츠와 깔끔한 갈색 바지를 입은 그가 내 앞에 앉아있다. 아는 사람도 없는 먼 타지에서 한국 사람을, 그것도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을 만나니 이 어색한 나라가 조금은 편해지고 있다. 잠시 시간을 보내고 도서관으로 간다. 수업 과제로 쓸 보고서를 위해 뇌과학 책을 골라 자리로 가져온다. 독일어로 쓰여있는 이 책을 천천히 해독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어렵지만 제법 재밌는 내용이 펼쳐진다. 그러던 중 J에게서 연락이 온다.
뭐하고 있었어?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야. 너는?
퇴근하고 집에 가는 중이야. 점심 먹었어?
응.
날씨는 괜찮고?
이제 많이 안추워.
다시 책을 편다. 창밖에는 강한 녹색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도서관 안에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 속을 여행중이다. 건너편에서 노트북은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갈색 머리의 남학생이 있고 오른쪽에는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금발의 여학생이 앉아있다. 한국에서도 매일같이 가던 도서관이고 사람들을 제외한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 주위에서 숨을 내뱉고 있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이유 만으로 매번 새로운 긴장감이 온몸에 맴돈다.
잘 지내?
두시간쯤 지나 휴대폰을 확인하니 J에게서 이런 문자가 와 있다. 평소에 전화를 할 때 그가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지만 오늘은 어딘가 다른 궤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어떤 의미일까.
응 잘 지내지. 너도 잘 지내지?
아니, 나는 잘 못 지내. 보고싶어.
보고싶다는 단어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가 나를 보고싶어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고 매일 보던 사이니까. 나도 많이 보고싶다고 답을 보내야 하지만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 옆에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없지만 그의 빈 자리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3달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흥미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솔직히 한국에서의 내 삶 속에는 내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나를 위해 본인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아버지,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듣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 그리고 나한테 큰 사랑을 보내주고 있던 J가 거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들 속에 ‘나’라는 존재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몇 명의 사람들이 남아있지만 다들 짐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다. 모두가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고 나를 반겨주는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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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하늘로 날아가는 담배연기처럼 나도 당장이라도 너에게로 날아가고 싶다. 그녀의 옆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싶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그녀의 사랑을 듣고 싶다. 그 얇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 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주면 좋겠다. 그 부드러운 살결로 내 몸을 감싸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퇴근하나보네?“ 옆을 보니 또 그 여자가 서있다. 오늘은 연한 분홍색의 짧은 스커트에 자켓을 걸치고 있다.
”퇴근은 아까 했는데 생각할게 좀 많아서요.“
”왜. 여자친구가 헤어지재?“
”그런거 아니에요. 그쪽도 퇴근하는 길이에요?“
”아니, 방에만 있으니까 좀 답답해서. 그리고 그쪽이 뭐야. 누나라고 불러. 정없게.“
”답답해서 나온 것 치고 약속이 있는 사람 같네요.“
”그냥 예쁘다고 해. 익숙하니까.“ 뻔뻔하지만 당당한 말투로 말한다.
”근데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돈 많고 예쁜 사람?“
”직업이 뭐냐고요.“
”궁금해? 왜?“
”전주에서 만난 사람을 서울에서 다시 만난 것도 신기한데 내 회사 근처에 살고,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이지만 항상 퇴근길은 아니잖아요. 처음 본 사람한테 같이 술 마시자는 것도 신기하고.“
”내가 많이 신경쓰였구나?“
”그건 아니거든요.“
”글도 쓰고 술 좋아하는 사람.“
”네?“
”작가라고. 바 사장이기도 하고. 저기 건너편에 바 보여? 저기 내꺼야.“
”글은 어떤거 쓰는데요? 책도 냈어요?“
”소설 써. 찐하고 느끼한 로맨스.“ 빨간 입술이 움직이면서 목소리가 나온다.
”유명해요?“
”베스트셀러 작가면 유명한걸로 쳐주나?“
”베스트셀러? 책 이름이 뭔데요?“
”내가 왜 알려줘야돼?“
”독자가 한명이라도 늘면 좋은거 아니에요?“
”내가 말해주면, 너 내 책 읽을거야?“
”그럴 수도 있죠.“
”됐고 따라와 술이나 마시자.“
갑자기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이끈다. 어색한 차가움이 느껴진다. 길을 건너 검정색 간판 아래로 내려간다. 계단을 한층 내려가니 큰 목재 문이 있고 강하게 밀고 들어가니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재즈가 들린다. 빈 술병들과 LP판들로 꾸며져있는 벽면 앞에 테이블이 있고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더 어두운 공간이 나타난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와인잔들이 마치 샹들리에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고 그 아래 바텐더가 한명, 바 좌석에는 한 커플이 앉아있다.
”사장님 오셨어요?“ 바텐더가 웃으면서 말한다.
”어 메뉴판좀 줄래?“
”여기 그쪽 가게에요?“
”누나라고 부르라고.“
”누나 가게에요?“
”응. 내가 사장이야. 예쁘지?“
”노래도 좋고 공간도 예쁘네요. 벽에 저것들은 뭐에요?“
”CD.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랑 사람들이 좋아할 만할 것들 다 모아둔거야. 한 10년 걸렸지.“
”저기서 그냥 꺼내오면 틀어줘요?“
”안바쁘면? 왜 듣고싶은 노래 있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난 마티니 한잔. 너는?“
”저도 그냥 같은 걸로 주세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고 벽면의 술병들중 두 개를 꺼내온다.
”사장님은 독하게 드시죠?“
”아무것도 안보일 정도로 독하게 부탁해. 얘것도 같은걸로.“ 바텐더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면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한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잔을 꺼내고 쉐이커에 얼음과 진, 베르무트를 따른다. 세차게 흔든 다음 서리가 껴있는 잔에 조금씩 따르고 올리브를 꼬치에 끼워 함께 건낸다.
”마티니 두잔 나왔습니다.“
”너도 한잔 마실래?“ 그녀가 술을 받으며 바텐더에게 말한다.
”그럴까요?“ 지난번보다 조금 더 환한 웃음을 짓고 다시 한잔 만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베르무트를 조금 더 넣는 것 같다. 금방 만들어 자신의 잔에 따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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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조금씩 내 방을 차지하고 있을 무렵 잠에서 깼다. 아침 7시, 제법 빠른 시간이지만 이제는 이쯤 일어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요거트와 딸기를 꺼낸다. 드립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면서 창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천천히 시간을 보내다 휴대폰을 킨다. 오늘은 J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무슨 바쁜 일이 있겠지. 다시 커피를 마시니까 문득 늘 맛있는 카페를 데려가줬던 그가 떠오른다. 항상 좋은 커피, 좋은 와인, 그리고 좋은 음악을 즐겼던 우리였다.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배웠고 함께했기에 경험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독일에서의 생활이 즐겁고, 내가 앞으로 해야할 것들에 대한 생각에 너무 빠져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는 무언가 한국에 두고 온 느낌이 강했지만 이제는 현재 내 앞에 있는 것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커피를 다 마실때쯤 휴대폰이 울린다.
오늘도 도서관 가?
준호오빠의 연락이다.
응 수업 듣고 바로 갈 것 같아. 요즘 공부하고 있는거 빨리 마무리해서 교수님이랑 말해보고 싶어서.
공부는 잘 되가고?
심리학만 하다가 뇌과학까지 같이 하려니까 조금 어렵기는 한데 그래도 재밌어. 아직 독일어가 어색하긴 하지만..
공부하다 막히면 물어봐. 아는 것들은 도와줄 수 있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 수도 있고.
고마워
이따가 같이 저녁 먹을래? 연구실 사람들이랑 같이 먹을건데 시간되면 너도 와.
내가 거기 가도 돼?
그럼. 다 심리학 공부하는 사람들이고 내가 한국인 친구 생겼다니까 궁금해하더라.
어딘지 말해주면 시간 맞춰서 갈게.
아니야 나도 도서관 갈 생각이라 같이 출발하자. 이따 7시쯤 나오면 돼.
알았어. 연락 줘.
접시를 정리하고 옷을 입는다. 아직 아침에는 선선하긴 하지만 제법 날이 풀렸다. 가볍게 입고 거리로 나서니 조금씩 얼굴이 익은 사람들이 눈인사를 건낸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 강아지와 꽃가게 사장님,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갈색 머리의 키가 큰 남자, 선글라스를 항상 끼고 일을 하고 있는 카페 직원.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제법 익숙해졌고 그 속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나에게 잘 맞는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