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저물어가는 태양

by 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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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렸어. 7번 게이트 앞이야.

그쪽으로 갈게.

알았어.

저기 보인다.


Y가 해맑게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아름다운 꽃잎을 닮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비행기 힘들었지?“

”밥만 먹고 쭉 자서 괜찮아. 밥은 먹었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 배 안고파?“

”조금 고프네. 뭐 먹을래?“

”먹고싶은 거 있어?“

”너가 추천해주는 곳으로 갈래.“

”나도 프랑크푸르트는 몇 번 안와서 잘 모르긴 한데 중앙역 옆에 학센이랑 사과와인 파는 곳 있어.“

”좋다. 거기로 가자.“


하늘은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을 조금씩 발라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길을 걸으면 보이는 부드러운 갈색의 건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여유롭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여행지에서 매번 느끼는 설레임이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다른 느낌을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내려 밖으로 나오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보인다. 사진을 찍으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여행객들과 썬글라스를 쓰고 웃음을 지으면 걸어가는 커플들, 벤치에 앉아 길거리의 공연을 듣는 어른들까지 모두가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하고 있다.


”여기야.“ Y가 한 가게를 가리키며 말한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많네.“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곳이야. 나도 지난번에 놀러왔을 때 독일 친구가 소개시켜줬어.“

”맛있겠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큰 가게는 어두운 갈색의 나무 기둥이 곳곳에 있었고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날이 조금은 덥지만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고 그녀의 추천에 따라 음식을 주문했다. 새콤한 향을 내는 사과와인을 한잔 마시며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날씨 너무 좋다.“

”맞아. 독일에 있는 동안 거의 다 너무 예쁜 하루였던 것 같아.“

”한국은 언제 돌아가?“

”수업은 다음달에 끝나는데 아마 여행 조금 더 하고 7월 말에 갈 것 같아.“

”여기 생활은 어땠어?“

”나랑 너무 잘 맞는 것 같아. 사람들도, 분위기도. 그리고 공부도 너무 재밌었어.“

”한국에서 배우는거랑 다른가?“

”음... 조금은? 대학원생들이랑도 친해졌는데 공부하는 방식이나 마인드가 좀 다르더라.“

”그래?“

”응. 오빠는 다음달부터 출근하나?“

”그렇지. 5일에 첫 출근이야.“

”이제 여행가기 힘들텐데 이번에 많이 즐기고 가야겠네.“

”아마 몇 년동안은 어렵지 않을까 싶어.“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고소하면서도 기름진 향기가 코를 찌른다. 바삭한 껍질 아래 익숙한 맛과 어색한 향이 입 안에 맴돈다. 와인 잔이 비어갈수록 얼굴을 붉어지고 긴장감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진다. 거리의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행복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보고싶었어.“ 음식을 반쯤 먹고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너는 안보고 싶었어?“

”보고싶었지..“ Y가 대답한다.

”스타일이 조금 바뀐 것 같아. 사진으로만 볼때는 크게 못느꼈는데 만나니까 느껴진다.“

”무슨말이야?“

”표정이랑 옷, 그리고 말투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변화가 있는 것 같아.“

”좋은거야?“

”잘 어울려. 너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말을 들은 Y가 수줍게 웃는다.

”맛있다.“

”그러게.“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이다. 그런 사이였다. 눈만 보아도, 입술만 보아도, 어떨때는 저 멀리서 목소리만 들어도 어딘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을 갖는다. 그녀는 달라졌다. 그리고 더 강한 확신이 말한다. 내 안의 변화를 그녀는 지금 느끼고 있다.


[ ]

”저 성당 들어가볼래?“

”그래.“

”예전에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갔었는데 차분하고 조용했던 것 같아.“


성당에 들어가니 화려한 모자이크를 넘어 따스한 햇살이 각각의 빛으로 들어온다. 초록색 유리판을 넘어 벽면에 자취를 남기고, 빨간색 유리판을 넘은 빛은 앞쪽에 앉아있는 노부부에게 쏟아진다. 우리는 조용히 뒤쪽 의자에 앉는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가슴앞에 두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내 옆의 남자는 황홀함을 느끼는 표정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호텔로 가서 좀 쉬자. 피곤하겠어.“

”그럴까?“

”응 여기서 많이 안 멀어.“

짐을 들고있지 않은 그의 왼손을 잡고 걸어간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 속에서 적당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조금 쉬다가 공원 갈까?“

”좋아. 나 여기서는 공원 아직 안가본 것 같아.“


알 수 없는 어색함이 흐른다. 예전에는 쉽게 느껴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마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느낄법한 그런 감정이다. J는 피곤했는지 짐을 풀고 침대에 눕는다.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그의 얼굴에 내린다. 짙은 눈과 불그스름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곁에 눕는다.


”오빠 피곤해?“

”시차 때문에 조금.“

”천천히 나가도 되니까 한숨 자.“

말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을까. J가 내 손을 잡는다.

”보고싶었어. 많이.“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 아름다운 입술이 점점 가까워진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참는다.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방 안의 유일한 소리의 근원이다. 다시 그가 나를 바라본다. 지금 우리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맞춘다.


”괜찮아?“ 그가 나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친 숨소리는 일정하면서도 규칙적이지는 않게 들려온다. 오랜만에 만지는 그의 어깨는 조금은 더 넓어진 듯 하다. 단단하고 굴곡진 그의 몸에 안긴다. 지금 이 순간만은 주변의 모든 것이 흑백이다. 오직 이 사람만이 햇빛을 받고 있다. 우리는 수없이 사랑을 말하고, 서로에게 그 사랑을 확인한다.

침대에 누워 여운을 서서히 느끼고 있으니 창밖에는 벌써 붉은 노을이 생겨가고 있다.


”이제 나갈까?“

”그러자.“


마트에 들려 음료와 과일을 사고 좋은 냄새를 풍기는 식당에 들어가 케밥을 하나씩 포장한다. 그의 왼손에는 돗자리와 카메라를 담은 가방이 들려있고 나는 우리가 마실 커피를 들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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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과 그 위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본다. 1억 5천만 km가 떨어진 곳에 있는 저 항성은 내가 있는 이 세상에 거대한 그림을 그린다. 계속해서 출렁이는 강물위에 붉은 빛과 주변의 건물들이 그려진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잠시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


”너무 좋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게. 서울이랑 비슷한 듯 하면서도 훨씬 설레.“

”아마 먼 유럽이어서 그럴거야.“

”이렇게 쉬는 날도 많이 있었어?“

”처음 올때는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못한거 같아.“

”왜?“

”공부를 하다보니까 재미도 있고 욕심도 생겼어.“

”여기서 하는 공부가 잘 맞았나보네.“

”응. 한국에서 할 때보다 훨씬.“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잠시동안 정적이 흐른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어색한 단어들이 점점 잦아든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공부를 더 할 것 같기는 해.“

”여기와서 느낀게 정말 행복했어.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하는 이 공부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매력적이야. 알게 된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여기서 공부를 더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더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의 태양은 저 멀리 있는 산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이 그리운 순간들도 물론 있었어. 아빠도 많이 보고싶고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진짜 많았어. 그런데 내가 지금 그냥 돌아가서 해야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후회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 해야할 것을 찾은 느낌이야. 나에게 딱 맞은 옷을 드디어 발견한 것 같고.“

”생각이 많았구나?“


Y가 웃음을 짓는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조금은 어렵고, 슬픔이 느껴진다.


”오빠는?“

”원하던 곳에 붙어서 우선 열심히 회사 다니려고.“

”축하해.“

”재밌을 것 같아. 궁금하기도 하고.“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게 부럽다.“ 그녀의 말에 웃음으로 답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꼭 바를 차리고 싶어.“

”바?“

”나도 나름 하고싶은거, 좋아하는거 다 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멋진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래서 나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안하면 후회할 것 같으면 다 도전하려고.

“오빠랑 잘어울린다.”

“골목길에 나만의 작은 바를 차리고, 근처에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의 카페도 같이 차리고 싶어.”

이제 태양은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하늘에는 그가 남기고 간 작은 빛들이 아직은 남아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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