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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우리가 함께 누워있는 침대에서 그가 말했다.
“뭐 먹을래? 밖에서 사올까?”
“그래 잠깐 나갔다오자.”
그렇게 우리는 밤 10시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큰 마트와 몇 개의 작은 바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조금 더 걷다보니 골목 입구에 피자집이 보인다.
“피자 어때?” 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좋아. 가보자.”
나이가 많은 사장님이 작은 화덕에 피자를 굽고 있다. 그의 앞에는 유리로 된 매대에 여러종류의 피자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고민을 하다 구운 새우가 올라간 피자를 사서 나왔다.
“맛있겠다. 냄새가 너무 좋아.”
“그러게, 여기서 되게 오래 장사하신 것 같아보여.”
“맞아. 시간이 늦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더라. 동네 맛집인가봐.”
“오빠, 술도 한잔 더 마실래?”
“그럴까? 여기 마트 들어가보자.”
“음... 맥주 마실래?”
“맥주도 좋은데 와인은 어때?”
“와인도 좋아.”
“이거. 피자랑 잘 어울릴 것 같아.”
“독일 와인이야?”
“응. Riesling 이야.”
“그래 그럼 이걸로 사서 가자. 방에 잔이랑 오프너는 있더라.”
나는 와인을, J는 피자를 들고 다시 호텔로 걸어간다. 천천히 길을 걷다 내가 그의 손을 잡는다. 가볍게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좁은 골목길을 지날때에도 그 손을 놓지 않는다.
“맛있다. 오빠도 빨리 먹어봐.”
“아직 따뜻해서 맛있네. 와인도 잘어울린다.”
“그러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보냈던 수많은 날들과 다르지 않은 그런 밤이지만 어색함과 미묘한 설레임이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서 나의 빈자리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해야 할 일들에 많은 시간을 쏟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해왔던 J이다.
“그때 친해졌다고 한 대학원생 친구랑은 아직도 친하게 지내?”
“응, 그 오빠 덕분에 연구실 사람들이랑도 알게 되고 연구 주제도 정해서 하고있어.”
“남자구나?”
“...응. 근데 뭐 다른 사이는 아니야.”
“너 믿지. 그런걸로 의심 안해. 너한테 도움 되는 사람이면 다 좋은 사람이겠지.”
“고마워...”
“연구는 어떤거 하고 있어?”
“인지심리학이랑 뇌과학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연구 하고있어. 뭐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준비단계이긴 하지만 구체화시켜서 실제로 해보는게 목표야.”
“사람들의 감정이면 기쁨, 슬픔 이런거?”
“그렇지. 여러 감정 중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랑이랑 흥분이야.”
“왜 하필?”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고 많은 감정들 중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의심스러운 감정이어서.”
이 말을 뒤로 잠시 정적이 흐른다. 아마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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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 들기 전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운다. 고소하면서도 쓴 향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연기는 한숨과 같이 하늘로 날아간다. 사랑은 의심스러운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확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어울리지만 의심스러운 사랑이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Y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실 뇌의 작용에 의해 발현되는 호르몬의 분비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사랑할때의 뇌의 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그래서 특정한 형태의 자극이 뇌에 주어지면 우리는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처럼 학문적으로는 명확할 수 있지만 반면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게 정말 사랑일까?‘라고 수업이 질문을 던진다. 당장 우리 자신들이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성적 흥분감을 사랑과 착각하고, 익숙함에서 빚어진 친근함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지나친 호기심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Y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확신을 갖지만 언젠가는 그때의 그 감정을 부정하는 길을 걷는다.
“내일 몇시에 일어날래?” 방에 들어오니 Y가 침대에 누워 나에게 묻는다.
“내일 일정이 뭐였지?”
“하이델베르크 근교여행.”
“많이 안 머니까 11시쯤 브런치 먹고 출발하자.”
“그러자.”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다. 부드러운 구름같은 감촉이 손에서 시작해 팔, 어깨, 다리 모든 곳에서 느껴진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물소리가 끝나고 그녀도 내 옆에 누웠다.
“피곤하지?”
“조금? 오빠가 더 피곤하겠다.”
“그래도 세상이 너무 예뻐서 다 잊었어.”
내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함께했던 오늘을 되새기고 있을지 지금까지 써내려간 둘만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 그녀가 지금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밝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잘자.”
“응, 오빠도.”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여자의 옆에 누워있다는 사실만으로 잠에 들기 어려운 이유는 충분하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려 노력하지만 밖에서 지나다니는 차들의 소리부터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 지금의 나에게는 아주 크게 들려온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자 나는 이불 속에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감고 있는 눈 아래에서 그녀를 상상한다.
5분쯤 지났을까 내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온다.
“오빠 안자?”
“잠이 잘 안오네.”
“피곤할텐데.”
“그러게. 씻고 누우니까 피곤함이 몰려온다. 근데 이상하게 잠은 잘 안와.”
“오늘 잘 자야 내일 더 재밌게 놀텐데.”
“너 때문이야.”
“응?”
“너 때문에 잠이 안온다고.”
“....”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우리는 말없이 입을 맞춘다. 내 오른손은 그녀의 목으로 향하고 그녀의 왼손은 내 어깨 위로 올라간다. 아마 내일은 오늘보다 더 피곤한 내가 하루를 시작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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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준비 다 했어.” J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한다.
“잠시만, 나 머리 조금만 더 하고.”
“천천히 해. 아직 시간 많아.”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더라. 가볍게 먹고 가자.”
“좋아. 조금만 기다려줘.”
“응.”
J는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면서 무언가를 읽고 있다. 그러는 그의 얼굴에는 사소하지만 다채로운 표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뭐봐?”
“아, 전자책이야.”
“어떤 책?”
“열리지 않은 창문을 바라보며. 이거 알아?”
“들어본 것 같아. 친구들이 재밌다고 말 많이 했었어.”
“그래? 진짜 베스트셀러인가보네...”
“재밌어?”
“요즘 일이 많아서 띄엄띄엄 읽다 보니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내용이 잔잔하면서 생각할 것들을 많이 던져줘. 사랑을 다루는 소설인데 다른 책들이랑은 다르게 다양한 관점이 많이 나와.”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맞아.”
“그 작가가 짧지 않은 사랑 쓴 사람 아니야?”
“그것도 알아?”
“그럼 엄청 유명하잖아. 작년에 도서관에서 봐서 읽어봤어.”
“나도 작년 겨울에 읽었는데 재밌더라.”
“오빠 말대로 글을 읽기 쉽게 쓴다기보다는 천천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 준비 다 했는데 이제 나갈까?”
“좋아. 식당은 바로 옆이야.”
여름날의 유럽은 화가가 정말 오랫동안 공들여 그린 그림같다. 지난 여행들에서 꽤 많이 봐온 길거리지만 매번 새로운 바람이 나에게 불어온다.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빵집을 지나 붉은 벽돌로 된 식당으로 들어간다. 10명정도 들어오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가게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나와 우리를 반긴다.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다. 나는 연어 샌드위치, J는 크루아상과 베이컨을.
“맛있겠다. 배고파. 빨리 먹자.”
“그래. 많이먹어. 부족하면 더 시키고.”
스모키함이 가득 느껴진다. 고소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문다. 음식의 맛을 잔뜩 음미하느라 앞에 있는 J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왜?”
“잘 먹어서.”
“오빠도 빨리 먹어. 완전 맛있어.”
“먹고 있어.”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있다.
기차 시간을 맞춰 역으로 향한다. 역에는 다양한 언어와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기차에 올라탄다. 수도없이 많이 느껴온 설레임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느껴진다. 잠시후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의 풍경들은 영화의 장면들처럼 스쳐지나간다. 옆에서 J는 잠에 들어있다. 많이 피곤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익숙한 눈과 코, 입술이 보이고 잔잔하게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사랑하고 보고싶었던 모습이지만 왠지 어딘가 비어있음을 느낀다. 어제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과 우리가 공유한 사랑을 생각한다. 그건 틀림없이 사랑일 것이다. 늘 그가 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이 들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사실 어제도 나는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노력한다는게 말이 되니
서로가 다른 건 특별하다고
같은 건 운명이라 했던 것들이 지겨워져
넌 오늘보다 내일 날 더 사랑한대
난 내일보다 오늘 더 사랑할 텐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생각들을 깨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있어 기쁘다. 그와 같이 먹는 맛있는 음식, 그와 보내는 밤 모두 나의 지난 행복들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조금 변한 것일까. 행복을 느껴야 할 나는 행복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