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주황색 지붕

by 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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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들어온 것만 같은 주황색 지붕의 집들이 발 아래 펼쳐진다. 1619년 지어진 하이델베르크 성의 공원에 앉아서 눈 앞에 전시되어있는 그림들을 감상한다.

“저기 앞에 서볼래?” 카메라를 목에 걸면서 Y에게 말을 건낸다.

“이렇게?”

“두걸음 정도만 뒤로 가봐. 그리고 이쪽 쳐다봐.”


말을 마치고 나는 차분하면서도 격렬하게 셔터를 누른다. 한낮의 햇빛과 맑은 구름이 그녀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작은 뷰파인더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숨을 잠시동안 참는다. 결과물을 확인해보면 아름다운 여성이 내 카메라 속에 담겨있다.


“이거 맘에 들어.”

“그래? 이것도 괜찮지 않아?”

“예쁘다. 뒤에 배경이 진짜 잘 담겼어.”

“너가 예뻐서 그런거야.” Y는 눈웃음을 짓는다.

“오빠도 찍어줄까?”

“난 괜찮아. 이번에 저기에 서봐. 또 찍어줄게.”

“맨날 나만 찍잖아. 오늘은 오빠도 사진에 등장해야지. 빨리 저기 가봐.”

“여기?” 카메라를 Y에게 넘기고 정원의 작은 동상 옆으로 간다.

“응. 그리고 구름을 바라보고 있어봐.”

“알았어.”

“오, 잘나왔다. 이번에는 카메라 보고 웃어봐.”

“이정도면 된 거 같은데?”

“아니야 좀 더 웃어. 환하게.”


Y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본다. 카메라를 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심히 사진을 찍은 그녀는 카메라를 한참을 확인하다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이거 어때?”

“잘나왔는데? 고마워.”

“맨날 오빠가 찍어줬잖아. 오늘은 내가 찍어주고 싶었어.”

앞으로 계속 내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이 목구멍을 올라오다 무언가에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날씨 진짜 좋다.”

“그러게. 오길 잘했다. 너무 예쁘네.”

“여기는 오빠도 처음이라고 그랬나?”

“응. 독일에서는 오래 있지 않아서 큰 도시들만 갔었어. 베를린이랑, 프랑크푸르트, 퀼른 이정도?”

“난 지난번에 연구실 사람들이랑 같이 왔었는데 그때도 너무 예뻤어.”

“그때도 여기 왔어?”

“아니, 그때는 갑자기 비가 와서 성은 못올라갔었어. 근데 비 오는 날도 되게 예쁘더라.”


나 안보고 싶어?


우정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한국은 새벽 5시, 그녀는 아마 가게를 닫고 글을 쓰고 있을 시간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서울에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오빠, 우리는 인연일까?” 잠시동안 한국에 가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그게 무슨말이야?”

“말 그대로.”

“음.. 너는 인연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언젠가는 꼭 만날 사이? 아니면 운명적인 관계?”

“불교에는 인연을 섭리 또는 운명이라고 설명한대. 사실 이런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도 다 인연이지.

천지가 한번 개벽하고다음 개벽이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을 ‘겁’이라는 단위로 표현하는데, 전생의 500겁의 인연은 옷깃을 스치고 1천겁의 인연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다고 해. 그리고 3천겁의 인연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자고 5천겁의 인연은 한 동네에서 태어나.”

“우리는 몇겁의 인연일까?”

“그러게. 알 수는 없지만 엄청 많았으면 좋겠어.”


그녀가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 그녀와 나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6천겁의 인연은 둘이 하룻밤을 보내고 7천겁의 인연은 부부가 된다고 한다. 우리의 인연이 전생의 7천겁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지만 조금 모자랄 것 같다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의 인연이 합쳐져 다음 생에라도 우리가 평생을 함께했으면 좋겠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몸에 흐르고 불행하게도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정말 우리의 인연은 부족한 것일까.

“오빠는 나 얼마나 사랑해?”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이 할법한 대화네.”

“넘어갈 생각하지마.”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어떤 답을 원해?”

“오빠가 하고싶은 대답.” 쉽게 넘어갈 수 없어 보인다.

“많이 사랑하지.”

“얼마나?”

“나보다 더.”

“그게 무슨말이야?”

“내 삶보다 너의 삶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자기의 인생이 1순위여야 되는거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나도 그랬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행복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너가 나보다 딱 한걸음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가끔 뒤돌아서 나를 봐줬으면 더 좋겠고.”

“감동인데?” 또 한번 눈웃음이 날라온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냐고 묻고 싶어 죽겠지만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식상하고 어린 연인들이 할 것 같은 그런 대화여서? 괜히 집착하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남자친구가 되기 싫어서? 아니면 원하지 못하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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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J를 사랑한다. 그런 J는 내가 자기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완벽하면서도 뻔하지 않아 큰 감동을 가져다주는 대답이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니까. 그에게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말을 건냈다.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J는 나에게 묻지 않았다. 역시 그는 참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실컷 걸었고, 맛있는 파스타와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다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많이 걸어서 그런지 제법 피곤함이 몰려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든 그의 곁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창밖을 보고 있다.


지난번에 준 초안 교수님이랑 같이 읽어봤는데 방향 잘 잡았더라.

준호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말요? 좋게 봐주셨다니 너무 감사해요.

캐런도 보더니 잘 썼다고 칭찬했어. 특히 흥분에 대한 내용.

직접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까 끝이 없어 보여서 요즘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네요. 다들 고맙다고 꼭 전해주세요.

한국 가기 전에 한번 다같이 보는건 어때? 다들 너가 곧 간다니까 많이 아쉬워하더라.

시간 되면 잠시 들릴게요.

내일은 어때? 교수님이 주말부터 프랑스로 출장 가셔서 다음주 목요일에 오셔. 너가 수요일에 돌아가지 않나?

맞아요. 근데 지금 남자친구랑 같이 여행하는 중이라서... 상황 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알았어. 연락줘. 재밌게 놀고.

네.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온다. J는 책상에서 노트북과 카메라를 연결해 찍어온 사진을 보는 중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인다.


“피곤하지? 먼저 잘래?”

“오빠는 안자?”

“나는 사진 정리 하고 좀 이따가 자려고. 너 먼저 자도 돼.”

“나도 같이 볼래.”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이거 진짜 잘나왔다.”

“오빠 사진 진짜 잘 찍는다.”

“이것도 마음에 든다.” J는 환하게 웃으면서 하나씩 넘겨가며 사진을 구경한다.

“사진 찍는게 왜 좋아?”

“음..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조금은 더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잖아.”

“멋지다.” 오랜만에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본다. 혼자 몇시간 전의 순간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

“내일은 뭐할까? 딱히 계획 없지?” 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묻는다.

“이제 곧 돌아가는데 뭐 더 하고 싶은거 없어?”

“나는 다 좋아. 너는?”

“사실 연구실 사람들이 밥 같이 먹자고 하는데...”

“그래? 너도 이제 한국 가니까 그 전에 보고 와. 나는 괜찮아.”

“아니면 오빠도 같이 갈래?”

“거기에 내가 가도 되려나?”

“당연하지. 내가 물어볼게. 아마 다들 좋아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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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노을 아래 각자에게 주어진 음을 뱉는 것 같이 새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느긋하게 쉬면서 시간을 보내다 Y와 그녀의 친구들을 함께 만나러 뢰머 광장으로 향한다. 한국에서 Y의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은적은 많지만 이곳 독일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는게 신기하고 기대된다. 내가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시간동안 함께 있어준 사람들이라 고마운 마음도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 내 빈자리를 완벽히 채웠을까봐 걱정도 밀려온다.


“여기야.” 한쪽 테이블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부른다.

그의 곁에는 교수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곱슬머리를 한 흑인 여자, 분홍색 셔츠를 입고 있는 동양인 여자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미국인 남자가 앉아있다. 우리를 부른 잘생긴 한국 남자와 함께. Y가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나를 소개한다. 자신의 연인이며 한국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고 지난주에 독일에 와서 이번 주말에 함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눈다. 독일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부터 요즘 날씨에 대한 이야기, 최근 재밌게 본 영화에 대한 내용까지 다양한 말들이 식탁 위를 오간다. 그들은 나를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고 따뜻하게 대해줬다. 가벼운 이야기들이 끝나고 Y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초점이 맞춰진다.


“한국 가서도 계속 할거지?” 준호가 Y에게 묻는다.

“응. 이곳에서 느끼고 공부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마무리 해보려고.”

“독일 사람들의 감정이랑 한국 사람들의 감정이랑 비교해 봐도 재밌겠다. 뉴스 보면 나라마다 행복지수도 다르고 그러잖아.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오빠는 연구 잘 되가?”

“계속 수정 중이지 뭐. 그래도 가을이 오기 전에는 마무리가 될 것 같아. 그래야 박사과정까지 제때 시작하고.”

“아 맞다 교수님이 너 대학원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시더라. 본인이 하시는 연구랑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정말?”


Y는 백발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교수는 그녀에게 졸업을 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연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더 보완할 방법과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해주며 설득한다.


“대학원 생각 있어?”

“가고 싶기는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빨리 돈을 벌어야 하기도 하고...”

“한국에도 좋은 연구실 많이 있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만 만약에 공부를 더 한다면 여기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긴 했어. 친구들 말 들어보니까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기는 하더라.”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 준호가 우리에게 시간이 된다면 한잔 더 마시자고 말한다.

“더 놀다 갈래?” Y에게 물었다.

“오빠 안피곤해?”

“나는 괜찮아. 너 가고 싶으면 가자.”

“그럼 우리 한시간만 더 마시고 들어가자.”

“그러자.”


사람들이 붐비는 광장을 조금 벗어나 작은 골목길로 들어간다. 길거리에 서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들을 지나고, 벽에 기대어 기타를 치고 있는 젊은 남자들도 지나 작은 술집으로 들어간다. 오두막같이 생긴 내부의 벽면에는 처음보는 술들이 나뭇가지 위의 새들처럼 차분히 앉아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재즈와 어두운 공간에 자리마다 촛불을 켜고 앉아있는 모습들이 인상깊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이 온화하게 생긴 주인이 우리를 맞이한다. 바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둘러보다 와인을 한병 주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특한 유리병에 담긴 술과 치즈가 나온다. 가게 사장은 자기 사촌이 직접 만든 홈메이드 와인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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