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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인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준호가 나에게 말한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네요. 달달하면서 끈적한 느낌이 좋네요.”
“독일은 어때요? 처음 오시는 거에요?”
“예전에 여행으로 한번 왔었는데 다시 오니까 예전에 못봤던 것들 까지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독일 좋죠...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착하고 다 좋은 것 같아요.”
“얼마나 계신거에요?”
“이제 2년 됐어요.”
“앞으로도 쭉 여기서 공부하실 생각이세요?”
“네. 박사까지 할 생각이라 일단은 몇 년 더 있을 것 같아요. 졸업하고도 계속 있을 수도 있구요.”
“한국에서 공부하는거랑 많이 달라요?”
“연구실 분위기라던가 심리학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다르긴 하죠. 그래도 국가보다는 교수님의 차이가 큰 것 같아요.”
“둘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Y가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그냥 뭐 이런저런 이야기...”
“이제 곧 돌아가는데 기분이 어때?” 준호가 Y에게 물었다.
“사실 별 생각없이 온 교환학생인데 너무 많은 것들을 배워서 가는 것 같아요. 놀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좋은 사람들 만나서 공부도 하고 앞으로 내가 뭘 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다 고맙죠.”
“다시 독일에 올 생각은 없고?”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아요. 돌아가서 졸업부터 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아직 시간 넉넉하니까. 언제든 올거면 얘기해. 교수님도 기다리고 계실테니까.”
“네. 감사해요.”
준호와 Y는 가까워 보인다. Y가 나랑 있을 때 짓지 않는 표정들이 가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다. 그들은 심리학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나도 멋쩍게 함께 웃는다.
“근데 둘은 어디서 처음 만났어요?”
“학교 주점에서 만났어요.” 나와 Y는 눈이 마주쳤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게 한 4년 전이네요 벌써.” 이번에는 Y가 말한다.
“그럼 거기서 J씨가 번호 물어본 거에요?”
“그건 아니고... 옆 테이블에 Y가 있었는데 너무 제 스타일이었어요. 부끄러워서 말은 못걸었지만 제 기억에 눈은 몇 번 마주쳤던 것 같아요. 전역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막상 복학하니까 너무 바빠서 여자를 만난적이 거의 없었어서 더 낯을 가렸죠.”
“그래요?”
“그러고 학교 건물에서 지나가다가 몇 번 마주쳤어요. 저는 Y를 기억 하고 있었으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여전히 예쁘구나 싶었어요.”
“나도 오빠 알고 있었어. 일부러 나랑 같은 엘리베이터 타려고 기다린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도 선뜻 말을 걸지는 못했는데 방학에 학교 앞 카페에서 다시 마주쳤어요. 방학에는 학교 근처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 카페에 우리 둘 밖에 없었어요.”
“맞아. 거기서 오빠 공부 엄청 열심히 하고 있었어. 저사람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는데...”
“운명적인데요?”
“그때 저는 학회 준비를 하고 있었고 Y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 하얀색 표지에 동양화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뭐지...? 아 ‘두번째 인류’였던 것 같아.”
“우리 둘만 있는것도 신기하고 계속 만나는 것도 신기했어요. 전부터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진짜 인사라도 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말 걸었어요? 전화번호 달라고?”
“이 오빠 완전 소심해서 못했어요. 제가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카페 앞에서 담배 피고 있더라구요. 전에도 좀 내스타일이다 싶기는 했는데 그때 입고 있던 셔츠가 너무 멋져서 제가 냅다 말 걸었어요.”
“뭐라고??”
“왜 자꾸 나 따라다니냐고.”
“그때 진짜 어이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말 들으니까 얼굴도 빨개지고 당황하고 있었는데 Y가 장난이라고 여자친구 없으면 연락처 좀 달라고 했죠.”
“멋진데요?”
“그렇게 연락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시덥잖은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한번 밥을 먹기로 해서 만났죠.”
“그때 우리 뭐 먹었는지 기억나?”
“파스타였나?”
“뭐래... 생선구이 였거든. 특이하죠? 여자랑 처음 밥먹는데 생선구이집 가자고 하니까.”
“취향이 확고하시네요.” 준호가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그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웃긴게 진짜 맛있었어요. 고등어구이가. 그리고 오빠가 꼭 알탕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시켰는데 그것도 엄청 맛있었어요. 알고보니 교수님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었더라구요.”
“거기 알탕 꼭 먹어야지... ”
“그러고 나서 연락 계속 하다가 같이 카페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다가 사귀게 됐어요.”
“그럼 고백은 누가 했어?”
“다행히 고백은 제가 했어요.” 내가 말했다.
“어떤 멘트였나요?”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게.”
“낭만적이다..”
“썸을 오래 타서 이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건지 그냥 누구한테 다 나이스한 건지 잘 몰랐었는데 어느샌가 표현을 점점 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수업 끝날 때 건물 앞에서 커피 들고 기다리거나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잘 기억해줬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여유있어 보이는게 좋았어요.”
Y가 와인을 마시면서 말한다. 그녀의 눈은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조금 올라간 입꼬리와 고개를 살짝 들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그녀의 옆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만 같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만나면서 우리의 관계 속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있었다. 매일 보고싶은 그리움부터 설렘, 안정감, 즐거움, 그리고 짜릿함까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의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파도는 점점 작아져갔고 어느샌가 우리의 사이에는 드넓은 바다가 아니라 고요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나누는 이 대화는 그 호수에 거대한 돌을 던졌고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해 서서히 물결이 퍼져감이 느껴진다. 예전의 Y의 모습과,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준호씨는 여자친구 없어요?”
“아쉽게도 없네요.” 그가 와인이 담긴 잔을 내게 내밀며 말한다.
“최근 연애가 언제에요?”
“독일로 오기 직전에 헤어졌어요. 졸업하고 나서 뭘 해야할지 고민하던 때인데 전여자친구는 이미 직장인이었고 제가 독일에 가서 공부를 더 할거라고 하니까 헤어지자고 하더라구요.”
“헐... 얼마나 만났어요?” Y가 자신의 잔도 들어 가볍게 부딫히며 묻는다.
“4년 조금 넘었어. 둘이 나이도 있고 꽤 만나서 결혼 얘기도 조금씩 했었는데 걔 입장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공부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겠지. 오래 만나다보니 서로 좀 무뎌진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좋은 사람 만날거에요. 준호씨는 여기서 공부 계속 하실 생각이죠?”
“네. 일단은 박사과정까지는 하고 그 다음에 생각하려구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여기 계속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갑자기 미국이나 호주 이런데 가서 살 수도 있어요.”
“멋진 인생인데요?”
우리는 빈 잔에 술을 다시 따르고 잔을 다시한번 맞댄다. 가득 찼었던 가게는 조금씩 비어가고 있었고 어두어진 길거리에서는 은은하게 기타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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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취했어?”
“조금? 적당히 어지러운게 기분 좋다.” 그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답한다.
“오늘 어땠어?”
“다들 좋은 사람들인거 같더라. 너가 여기서 맨날 혼자 다닐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덕분에 재밌었지. 많이 배우기도 했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두근거리는 감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두운 거리 속 줄지어 서있는 노란색의 가로등과 강물에 비치는 그 불빛들, 거리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내가 잡고 있는 이 손은 조금은 거칠지만 따뜻하고 내 손을 완전히 덮고 있다. J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특유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 보인다. 그는 아마 지금 이 순간을 잘 즐기고 있을 것이다.
“옛날얘기 하니까 설렌다. 안그래?” 그가 묻는다.
“그러게. 처음 만나던 날부터 다 생각나. 엄청 긴장되고 설레고 그랬었는데...”
“맞아. 너 만나러 가는 날이면 전날 만나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고 그랬었는데. 완전 영화 대본 쓰는 것처럼.”
“정말? 왠지 초짜같은 티가 나는데 능숙한 척 하는 것 같더라.”
“근데 Y야. 지금 우리의 사이랑 예전 우리의 사이가 같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주변에서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스쳐지나가고 나와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다르지 않을까?”
“어떻게?”
“비슷한 부분이 더 많겠지만 작은 부분들은 다를 것 같아. 아무래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
“그럼 우리의 사이 말고 각자의 마음은?”
“잘 모르겠네..”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잖아 우리의 일상에.”
“오빠는 그럼 마음이 변했어?”
“조금은?”
그의 말을 들었지만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묻지 못했다. 무서웠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을까. 천천히 생각해보면 나는 마음이 변했다. 여전히 J를 사랑하지만 어딘가 변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나만을 향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참 이기적이지만 그의 입에서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곤하지? 빨리 씻고 자자.” 방에 들어와 그가 내 가방을 받아주며 말한다.
“오늘 하루도 재밌었어. 덕분에.”
“나도.”
“오빠 같이 씻을래?”
“그럴래?”
흐르는 물이 그의 어깨를 따라 흐른다. 그 물방울들은 나에게로 떨어지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다가 입을 맞춘다. 나는 그에게 안기고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몸에 묻은 비누거품이 오묘한 촉감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물을 맞는다. 그는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굴곡진 그의 등을 만진다. 시끄러운 물소리를 잠잠하게 만드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가 같이 씻었던 날들이 떠오르고 그때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거울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이 서로를 더욱 흥분시킨다.
“안뜨거워?” 그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며 묻는다.
“응 괜찮아.”
“오랜만이다. 같이 씻는거.”
“그러게. 옛날생각나네.”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왜?”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리워.”
“나도. 돌아가고 싶네.”
그의 손은 따뜻한 바람과 함께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나는 그 손길에 몸을 맡긴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들을 회상한다. 대부분의 장면에 J의 모습이 있고 그는 항상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다. 우리는 사랑했고 그것 외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었다. 그 순간들 속으로 들어가보니 지금의 관계와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자리를 채워줄 수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질감의 가장 큰 원인은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에게 설레고 사랑을 느끼지만 우리의 사랑은 희미해져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J는 늘 그랬듯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