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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좀 할만 해요?”
“네 대리님. 잘 챙겨주셔서 덕분에 금방 적응한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요 지금. 앞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들이 많이 있을텐데 너무 당황하지 말고 모르는거 있으면 언제나 물어봐요.”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퇴근할게요. 늦었는데 J씨도 빨리 들어가요.”
“자료 정리만 마무리하고 들어가려구요. 수고하셨어요.”
“그래요. 내일봐요.”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있었고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없고 바쁜 일상의 반복이지만 꿈꿔왔던 삶이라 아직은 피곤함보다 흥미로움이 더 크다. 물론 체력적으로는 부담이 되고 있지만. 하루종일 들여다보던 자료들을 체계화시켜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만 다들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택시를 잡으러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이제 퇴근한거야?”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에서 우정이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네. 일이 좀 많네요.” 길을 다 건너서 그녀 앞에 선다.
“맨날 늦게끝나네. 일이 그렇게 많아?”
“돈 많이주잖아요. 값은 해야죠.”
“돈만 많으면 뭐해, 행복해야지.”
“전 지금 행복해요. 일도 나름 재밌고 상상했던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달까.”
“술이나 한잔 하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해서 오늘은 좀 봐주세요.”
“말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따라와. 사줄게.”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당장 씻고 잠에 들고 싶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왠일로 바로 안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녀의 바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이자카야였다.
“오랜만에 여기서 술 마시고 싶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못갔거든. 여기 맛있어.”
“근데 저 술은 많이 못마셔요. 진짜 내일 일찍 일어나야돼.”
“우리집에서 재워줄게. 그럼 됐지?”
“뭐래.”
“여자친구가 싫어하려나?”
“당연한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싫거든요.”
“참치 먹자. 고생했을텐데 맛있는거 먹어야지.” 우정은 익숙한 듯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요리를 주문했다.
“그러면 오늘은 제가 살게요. 너무 얻어먹었어. 내가 사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됐어. 누나 돈 많아.”
“일은 대충하는거 같은데 왜 돈이 많지? 바에서도 일 안하고 술만 마시는거 같은데...”
“바는 그냥 재미로 하는거고. 나 낮에 글 엄청 많이 써.”
“신작 안나온지 좀 되지 않았어요?”
“창작은 어려운거란다.”
“저도 이제 돈 벌어요. 나름 잘버는데.”
“난 원래 부자였단다.”
“그건 뭐 할말 없네.”
“일은 할만 해?”
“아직 배우는 중인데 할만한 것 같아요. 내가 좀 똑똑해서 금방 익히거든요.”
큰 접시에 예쁘게 담긴 참치회와 여러 종류의 초밥, 그리고 큰 사케 한병이 나왔다.
“나한테는 왜 안물어봐. 일 할만 하냐고.” 우정이 술을 담은 잔을 건내며 묻는다.
“어떤데요?”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재미없어.”
“네?”
“맨날 거기서 거기잖아 사는게. 재미없어졌어 그래서. 새로운게 필요해.”
“새로운거 뭐?”
“남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내밀며 말한다.
“연애 왜 안해요?”
“맘에드는 놈이 없어서.”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키 크고 잘생기고 귀여운 남자.”
“없을만 하네.”
“있는데?”
“근데 왜 안만나요? 꼬셨는데 안넘어온건가?”
“그래서 열심히 꼬시는 중이야.”
“전 착한 여자 좋아해요.”
“나 착한데?”
“아닐걸요?” 우리는 다시 잔을 맞댄다.
“여자친구랑은 어때. 잘 지내?”
“모르겠어요. 상황이 너무 다르다 보니까 쉽지 않네요.”
“유학갈수도 있다며. 결정했대?”
“아직은 고민중인거 같긴 한데... 아마 갈 것 같아요. 워낙 하고싶어했던 일이라”
“기다릴거야?”
“기다려야죠. 사랑하는데.”
“언제올줄알고?”
“...오겠죠.”
“교환학생 갔을때도 힘들어했으면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자신있어?”
“술이나 마셔요.” 점점 몸은 달아오른다.
“가지 말라고 해.”
“어떻게 그래요. 걔가 좋아하는거 다 아는데.”
“넌 안좋아한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늦게까지 일하는 너 만나러 회사 앞에 찾아온 적은 있고?”
“걔도 요즘 졸업준비하고 대학원 알아보느라 바빠요.”
“연락은 자주 하고?”
“매일 하긴 하는데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저도 일이 너무 많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하루종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직도 사랑한다고 확신해?”
“같이 했던 좋은 기억들이 너무나 많고 가끔 만나도 사랑스럽게 보이니까 알죠.”
“사랑이야? 아니면 편안함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로 가슴 뜨겁게 사랑하는건지 아니면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가 옛날의 좋았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얻는건지 아냐고. 예전에는 매 순간 보고싶고 뽀뽀하고 싶었을 거 아니야. 지금도 그래? 아니면 그냥 바쁜 현실에서 좋았던 기억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거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직 사랑하는데, 당연히 사랑하는데...” 이번에는 홀로 술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난 이래서 연애할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좋겠지. 행복할거야. 사랑은 마약같은거야. 처음 맛보면 현실을 잊게 하지만 가까이에 없으면 초조하고 두려워. 그리고 이제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면 깊고 어두운 곳에 떨어지는 것 같잖아.”
“그래도 행복하잖아요. 나랑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 행복이 길어지지 않을까요? 세상에 몇십년동안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런데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운명의 상대인지 아닌지는 그 몇십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알 수 있잖아.” 그녀가 어딘가 슬퍼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담배 한 대 피고 와요.”
우리는 밖으로 나온다. 우리가 서있는 어두운 골목은 매우 좁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날라간다. 그 순간동안 우리는 말없이 숨만 내뱉고 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지금의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이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잘 읽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지만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늘 밝고 자유로워 보이던 우정의 얼굴에도 약간의 그림자가 겹쳐보인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 큰 돈을 번 아름다운 여자에게도 삶의 애환이라는 것이 있어 보인다.
“근데 누나는 마지막 연애가 언제에요?” 다시 돌아와 술을 마시면서 말을 건낸다.
“글세, 기억도 안나네.”
“맨날 내 얘기만 하잖아. 말 해줘요.”
“3년전.”
“오래지났네요. 얼마나 만났는데요?”
“9년.”
“그러면... 스무살때부터 만난거에요?”
“그랬지. 잘 살고 있으려나.” 이번에는 그녀가 혼자서 술을 마신다,
“왜 헤어졌는데요?”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권태기 그런건가?”
“처음에는 다른 여자랑 바람피나 싶었어. 정말 좋은사람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한번 드니까 계속 의심하게 되고 평소랑 다를바 없는 작은 것들도 다 안좋게 보이더라. 근데 알고 보니까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 뿐이더라고. 학교에서 글을 쓰던 날은 매번 찾아왔었던 사람이 몇시간째 연락도 안받고, 같이 여행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애가 혼자 해외여행을 가기 시작했어. 오래 만나다보니 더 편해지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각자 하고싶은 것을 하는 연애를 추구했어서 별 생각 없었는데 그게 아니었지.”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거에요?”
“걔는 취업해서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 퇴근하는데 나는 오후에 일어나서 밤새 글만 쓰다 보니까 자주 못보게 되더라. 그 사이에 생각이 정리됐나봐. 첫 소설을 내고 만나서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데 이제 나를 안좋아한대.”
“그래서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조금 시간을 갖고 고민해보자 하더라. 나는 아직 많이 사랑하니까 내 옆에 있어달라고 말했지. 이제 돈도 버니까 결혼하자고 했어. 그런데 막 화를 내더라. 결혼이 그렇게 쉬운거냐고. 너는 나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냐고.”
“9년이나 만났는데?”
“난 할 수 있다고 했어. 돈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내 옆에서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만 해달라고. 시간이 필요하다길래 기다렸지. 한 일주일정도? 그러고 걔가 집앞에 찾아왔다길래 프러포즈 하나 싶어서 급하게 나갔는데 미안하대. 미안한게 뭐야. 그냥 헤어지자, 이제 안좋아한다 말하면 되잖아. 자기는 나랑 결혼 못할 것 같대. 미안해서.”
“울었어요?”
“울었지. 길거리에서 세상 처량하게 울었어. 그런데 걔가 나를 안아주고 쓰다듬었어.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 싶었나. 그래서 그냥 헤어지자고 했어. 그 손길에는 사랑이 아니라 정만 있었거든. 그러고 뒤돌아서 갔는데 안잡더라.”
“그 전에 티가 났어요?”
“나한테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지. 어떻게 그걸 몰라. 그런데 그게 이정도일 줄은 몰랐어. 날 안사랑하는 사람이랑 어떻게 만나. 이제 결혼도 생각해야 할 나이잖아.”
“그래서 그 이후로 연애 안한거에요?”
“일에 빠져있었어. 책도 3권이나 더 쓰고 바도 차려서 열심히 일했지. 그러니까 좀 덜 슬프더라. 걔가 좋아해서 여행가면 맨날 만들어줬던 칵테일을 손님들이 시킬때면 뭐 아직도 그립고 생각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잊었지. 벌써 결혼도 했던데.”
“한잔 해요.”
“뭐 연애를 다시 해볼까 싶기는 했는데 재미없어보이더라고. 그렇게 끌리는 사람도 없었고.”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당연하지. 나 좋다는 남자들은 많았어. 근데 딱 꽂히는 그런게 없어 다.”
“부럽네요.”
“우리집에서 한잔 더 할래?”
“집 가야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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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야 너 대학원은 결정 된거야? 어디로 가기로 했어?” 애리가 소주를 내 잔에 따라주며 묻는다.
“아직...”
“너는 다 붙을 수 있잖아. 가고싶은데를 못골랐어?”
“응. 독일로 가고싶기는 한데... 모르겠어 너무 큰 도전이잖아.”
“한번 갔다왔는데 뭐 어때. 좋았다며.”
“좋았지. 그래서 문제야. 이번에 가면 못돌아올 것 같아. 돌아온다고 해도 아주 오래 지나서 오겠지.”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이구나?”
“그것도 그렇고 아빠도 혼자 계시고 그러니까...”
“오빠는 뭐라고 하는데?”
“하고싶으면 하래. 후회안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근데 독일 가면 헤어지게되는거 아니야? 너네 아직도 엄청 달달하잖아.”
“잘 모르겠어.”
“뭐야, 싸웠어?”
“그건 아닌데... 독일에서부터 뭔가 내가 변한거 같달까? 옛날에는 진짜 맨날 보고싶었거든. 같이있으면 너무 행복하고 모든 것을 다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안들어. 바빠서그런가.”
“사랑이 식은거야?” 애리가 웃으며 잔을 건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생각 진짜 많이 했거든. 오빠한테는 내가 1순위인 것 같은데 나한테는 내가 1순위인 것 같아. 그러다보니까 그 마음을 다 받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는 그게 더 심해질 것 같고.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살고싶은 삶을 사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너네가 얼마나 만났지?”
“이제 3년이지 거의.”
“독일가서 박사까지 하면 최소 6년아니야? 그러면 결혼할 나이잖아.”
“맞지.”
“헤어질거면 지금 헤어져야 하겠네.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고 그런건 아니고?”
“더 좋은 남자가 있을까?”
“그런데 뭘 고민해. 독일 가지 말고 사랑을 잡아야지.”
“근데 만약 내가 안사랑하는거라면?”
“그게 무슨소리야 또.”
“사랑은 그런거잖아. 막 뜨겁고 맨날 보고싶고 안아달라고 하고 싶은 그런거. 근데 요즘은 안그래. 솔직히 이것저것 하다보면 어떨때는 하루종일 걔 생각 안하고 사는 날도 있어. 오빠도 바쁘다보니 연락도 잘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찾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제는 안사랑하는거 아닐까 싶기도 해.”
“오빠도 너가 이런거 알아?”
“말한적은 없지. 근데 아는 것 같아. 그런거 되게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이거든.”
“오늘 진탕 마시고 달려가. 그리고 일단 키스를 한번 해. 그러면 좀 알지 않을까?”
“하... 어렵다...”
우리는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혀끝에서 올라오는 알코올의 강하고 역한 냄새가 어느새 익숙해져있고 한잔 한잔 넘길때마다 머릿속의 고민들은 배로 커져만간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우리가 함께 했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 기억들 속의 내 표정은 행복에 가득차 있지만 그것을 상상하는 지금의 표정은 걱정과 고민에 사로잡혀있다. 정말 내 사랑이 식었다면 우리는 헤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랑에 있어서는 열정도 중요하지만 배려와 헌신이 중요하다. 그것들이 갖춰진 사랑만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감정 속에는 무엇이 녹아있는지 잘 모르겠다. 모르고 싶어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