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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간 돼? 저녁 먹자.
Y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싶은 것일지 상상하며 일을 마치고 그녀를 만나러 강남역으로 갔다.
“여기야.”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가 나를 부른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왔어. 일하느라 힘들었겠다.”
“오늘은 시간이 금방 가더라.”
“고기 먹으러 가자. 고생했는데 내가 사줄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갔다. 우리도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회식하러 온 직장인들, 데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연인들, 이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 사이를 걸었다. 서울의 밤이 주는 활력과 그 속에 녹아있는 애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생했어. 일은 안힘들어?”
“아직 한달밖에 안지나서 잘 모르겠어. 일 배우면서 적응하는 중이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때?”
“다들 엄청 똑똑하셔서 많이 배우고 있어. 착한 분들이라 잘 챙겨주시기도 하고.”
“다행이네.”
“너는? 대학원 준비 잘 되가? 이제 원서 접수해야지.”
“응. 오빠, 나 독일 가려고.”
“그래? 잘됐다.”
“오늘 점심에 교수님께 메일 보냈어. 아까 확인해보니 1월부터 바로 오라고 답장 왔더라.”
“3달 남았네. 이번에 가면 언제 와?”
“중간중간 한국 들어올거긴 한데 아마 박사까지 다 끝나면 돌아올 것 같아. 뭐 하다가 안맞으면 때려치고 올 수도 있고.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미안해.”
“너가 왜 미안해. 다 너를 위한 거잖아. 너가 하고싶었던 것이고.”
“그래도.”
“미안해하지마. 독일 뭐 별거 없잖아. 금방 가던데?” 내 말에 Y가 웃는다.
“오빠 이제 회사 다니느라 바쁘잖아.”
“휴가 쓰면 되지.”
“그러려나.”
“그래. 걱정하지 마. 가서 하고싶은거 다 하고 와.”
“고마워.”
“고기 많이 먹어. 남은 3달동안 맛있는거 많이 먹고 가. 가면 그리울거야.”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조심스럽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맛있다.”
“술 한잔 할래? 내일 출근이라서 좀 그럴라나?”
“아니야. 한잔 하고 가자. 둘이 술 마시는것도 오랜만이잖아.”
“맞아. 요즘 둘다 바빠서 밥이나 겨우 먹었지 술은 한국와서 처음인 것 같네.”
“바 갈래?”
“좋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지나 신사동 쪽으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감을 느끼며 서울의 밤 거리를 걷다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골목에 들어서니 나무로 된 간판에 붉은 색 글씨로 쓰여있는 바가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된거야? 이런데 술집이 있네?” 안에 들어가니 Y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바 하는 친구가 있는데 소개해줬어. 술도 맛있고 분위기도 너무 좋다고.”
“전에 와봤어?”
“응, 친구랑 한번.”
“좋은 친구네. 노래도 좋고 인테리어도 내스타일이다,”
“뭐 마실래?”
“오빠가 추천해줘.”
“맨해튼 어때?”
“그게 칵테일 이름이야?”
“응. 맛은 달달하기도 하지만 좀 쎄. 괜찮아?”
“오늘은 쎈거 좋아. 오빠는 뭐 마시게?”
“나는... Bee's Knees.”
“그건 또 뭐야. 꿀벌의 무릎..?
”진 베이스 칵테일인데 설탕 대신 꿀이 들어갔어. 제대로 만드는 곳이 별로 없어서 나도 예전에 파리에서 딱 한번 먹어봤는데 여기는 뭔가 맛있게 만들어줄 것 같아. Bee's Knees가 최고라는 말이래.“
주문한 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침묵을 위한 침묵이 아닌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어서 생긴 침묵이었다. 아마 우리는 해야할 말들중 어떤 것을 먼저 내뱉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해야할 말들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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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한모금 마신다. 버번 위스키의 향과 체리에서 나오는 달콤한 향이 어우러져 입안에 퍼진다. 혀에 닿자마자 독한 알코올이 느껴지고 끝으로는 오렌지의 향이 찾아온다.
”맛있다.“
”좀 쎄지 않아?“
”평소에 마시던거에 비하면 독하긴 한데 그래도 맛있어. 향이 되게 우아하다.“
”그래서 맨해튼의 별명이 칵테일의 여왕이야.“
”역시 술은 잘 아는 사람이랑 마셔야돼. 그건 어때?“
”이것도 좀 쎈데 다른 칵테일들이랑은 좀 다른 달콤함과 훈연향이 되게 잘 어울린다. 맛있어.“
”여기 되게 좋다.“
”그런데 오늘 할 말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의 질문에 나는 외면하고 있었던 감정들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오빠 나 사랑해?“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예상했지만 오히려 그의 표정은 차분해 보였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다. 나도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동안 조용히 서로를 마주했다.
”사랑하지“ 침묵을 깨고 그가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랑은 비교할 수 없잖아.“
”그래도.“
”모양이 다르긴 하지만 그때만큼 아직도 사랑해.“
”그런데 우리 요즘...“
”바쁘지? 정신도 없고 고민도 많고.“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요즘.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따뜻하면서 성실하고 배려심도 깊어. 잘생겼고 키도 크고 무엇보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니까. 오빠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어. 자꾸 생각나고 틈만나면 보고싶었거든.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잘 안나.“
”얘기해줘서 고마워. 고민이 좀 있어 보이더라.“ 내 말을 들은 J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매번 내가 보고싶고 자꾸 생각나고 그래?“
”너 생각 많이 나지. 회의를 하고 있는데 나만 빼고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울하고, 그러면 그냥 머리를 비우고 너를 쎄게 안고 싶어. 점심에 연어덮밥을 먹을 때면 너가 좋아하던 서촌의 그 식당이 떠오르고, 지하철역에서 너가 뿌리는 향수 냄새를 우연히 맡으면 순간적으로 너가 떠올라. 나는 그래.“
”그런데 연락도 잘 못하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잖아.“
”우리 요즘 바빴잖아. 나는 일 하고 너는 공부하면서 유학 준비하고. 내가 생각해도 우리 사이는 예전이랑은 조금 달라졌어. 나도 처음에는 이런 관계가 싫기도 하고 힘들었는데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어. 누구에게나 이런 상황들을 찾아올 수 있고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부부들은 이미 다 겪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덤덤해지더라. 요즘처럼 서로 표면적으로는 신경을 잘 쓰지 못하는 시기가 있으면 나중에는 또 우리 둘만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없어지는 그런 때가 오지 않을까?“
그는 말을 끝내고 술을 한잔 마신다. 나도 그런 J의 모습을 보고 잔을 든다. 독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 올라온다.
”나 독일 가는 것은 괜찮아? 나는 더 멀어질 것 같아서 두려워. 그래서 이것도 고민을 진짜 많이 했거든. 너무 하고 싶은 공부이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큰 선택인데 나한테 오빠도 그런 선택이니까.“
”솔직하게 말할까?“
”말해줘.“
”나는 너가 안갔으면 좋겠어. 그냥 어디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 있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내가 그냥 찾아가면 너를 볼 수 있잖아. 정신없는 하루가 끝나고 밤에 만나서 맥주 한잔 하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말은 차마 못하겠더라. 나도 이 기회가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으니까. 그래서 너한테 하고 싶으면 가라고 말한거야. 그 말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행복인 것 같아.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너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어.“
”왜 내 행복이 오빠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데? 오빠는 자기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모르겠다.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거든. 그 어떤 것보다 내 행복이 우선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이런게 사랑 아니겠어?“ 그가 웃으면서 술을 마신다. 내 심장을 수없이 후벼판 그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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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줄게. 오랜만이잖아.“
”아니야. 혼자갈 수 있어. 반대 방향이잖아.“
”옛날에는 새벽에도 오갔는데 뭐 어때. 가자.“
우리는 같이 택시에 올랐다. 반짝이는 강남역의 높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고, 조용한 아파트들이 가득한 동네도 지나고 나면 넓은 한강이 펼쳐진다. 몇몇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려가고 있고 우리는 말없이 창밖에 펼쳐진 일렁이는 풍경에 집중한다.
”예전에 드라이브도 많이 했었는데.“ 내가 슬며시 Y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며 말을 건낸다.
”맞아. 한강도 많이 보고 가끔 밤에 바다보러 가기도 했잖아.“
”그때는 좋았는데. 이렇게 고민도 없었고.“ 잡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어느새 택시는 그녀의 집 근처에 도착했고 우리는 집 앞 골목길에서 멈췄다.
”내일 뭐해“
”집에서 좀 쉬다가 운동 갔다가 밤에 부모님 뵈려고. 이번에 누나가 한국 들어와서 같이 보기로 했어.“
”잘 지내시지?“
”응. 누나는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나봐. 이번에 들어와서 상견례 하고 일정 잡는다는 것 같아.“
”축하드린다고 꼭 전해줘.“
”알았어. 너는 내일 뭐해?“
”이번 주말까지는 좀 쉬려고. 다음주부터 지금까지 했던 포트폴리오들 쭉 정리하려고. 12월쯤에 교수님께 보내드리기로 했어.“
”밤에 잠깐 볼까?“
”시간 돼?“
”저녁만 먹고 나오지 뭐. 너네집 앞으로 갈게.“
”아니야.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 그러면 내일 시간 보고 연락줘.“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오늘 고마웠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 말한다.
”안아줄까?“
”응.“ 우리는 좁은 골목에서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학생 시절의 맑으면서도 수줍은 사랑이 떠올랐다.
”내일봐.“
”잘자.“
”사랑해.“
”나도.“
”이제 갈게.“
”조심해서 가.“
”연락할게.“
”응.“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Y와 같이 뒷좌석에서 손을 잡고 있을 때에는 차의 속도보다 빨랐던 시간의 흐름이 지금은 하염없이 게으르게 흘러가고 있다. 창문을 내리고 밤 공기의 냄새를 맡는다. 선선하면서도 따뜻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진다.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본다. Y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순간부터 우리가 같이 잤던 첫 밤, 함께 보낸 그녀의 생일, 놀이공원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 독일에서 같이 공워에 누워있던 순간까지 우리가 같이 서있는 기억의 모든 조각들을 하나씩 되새겨본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 세상에 나오는 방식이었다.
오늘 좀 설렜어. 고마워.
집에 도착할때쯤 Y에게 연락이 왔다.
나도 오늘 좋았어. 어려웠을텐데 먼저 말 꺼내줘서 고마워.
집 도착했어?
이제 택시 내려서 가는 중이야. 다왔어.
잘했네. 나는 이제 자려고.
잘자. 내일도 쉬니까 늦잠 자. 푹 쉬어야지.
알았어. 오빠도 잘 자.
안녕.
집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설레임에 만족하고 숨을 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