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로 가는 기차

판단과 선택, 그리고 같이 올 결과는 모두 나의 것

by 이관민

#35.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

어디서나 국경을 건너는 일은 신기하고 설레는 것 같다.

이번 일정에서는 나는 두 나라를 지나가야 했고,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차있었다.

6일 간 머물렀던 체코를 떠나 다음 행선지는 슬로베니아였다. 그 중간 오스트리아에서는 물가도 비싸고, 개인적으로 흥미가 없어서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비행기도 없고, 버스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구글 지도에 철도 표시된 선을 연결해보았고,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2번 기차를 갈아타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부데요비체-린츠-잘츠부르크-류블랴나 순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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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나는 호텔에서 일찍 체크아웃한 뒤 부데요비체 역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는 굉장히 좁고, 오래되었다. 분위기 또한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가면서 마치 호그와트 학교로 가는 느낌이었다. 같은 칸에 마주 보고 앉아있던 체코 친구와도 이런저런 얘기와 토마토 한 조각을 얻어먹고, 나는 별일 없이 린츠에 도착을 했다. 잘츠부르크까지의 여정도 워낙 큰 역이다 보니 안전하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속으로 '이 정도면 현지인 다 됐지'하면서 마음을 푹 놓았다. 약간의 자만감과 함께 평화로운 마음으로 슬로베니아 정보를 찾아보면서 마지막으로 류블랴나행 기차를 탔다.


'나는 기차로 시베리아까지 횡단해온 사람이야'라는 자만감에 빠질 무렵, 내가 탄 방에 들어온 역무원은 내 표를 검표하면서 계속 "빌야", "부스"라고 하면서 나에게 뭔가 강조하는 것 같았다. 알아듣지 못한 나는 대충 알아들은 척하면서 넘겼는데, 이것이 이날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가는 길은 너무 아름다웠다.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뻗어온 높고 뾰족한 눈 덮인 산들과 밑에서 흐르는 아주 깨끗한 강물. 절경들이 마음껏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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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기차에서 길을 잃다

오스트리아의 남부지역, 알프스 산맥의 장관에 흠뻑 빠진 나는 보다 지쳐 GPS상에서 내가 예상했던 기찻길과 다른 방향의 길로 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이게 맞겠지 하고 나 자신을 믿었다. 하지만 생각해 놓은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 기차는, 자꾸만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내가 탄 칸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윽고 기차는 멈춰 섰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종착역임을 알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헝가리행 비행기를 놓쳐서 멍청하게 서있던 그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내린 역은 오스트리아 남부 도시 클라겐푸르트. (한참 후에야 이곳이 휴양도시인 것을 알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운 저녁. 이곳이 아주 작은 산골 오지 마을인지 대도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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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이 늦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슬로베니아로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인포에서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슬로베니아로 가려면 'Villach'라는 도시에서 내려 류블랴나행 '버스'를 탔어야 했었다. 처음에 역무원이 그렇게 빌야, 부스 라고 말했었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한 나의 멍청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그럼 나 여기서 어떡하냐' 하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런 내가 한심하고, 불쌍해 보였는지, 다시 클라겐푸르트에서 류블랴나행 티켓을 끊어주었다.

IMG_1790.JPG 클라겐푸르트역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절대 헤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독일어에 집중할 즈음 다행히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만나 내 여행의 여정을 들어주시고 필라흐에서 내려 류블랴나행 버스를 타는 것 까지 도와주셨다.


#37. 블레드로 선택하다!

슬로베니아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긴긴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터널을 지나가니 조용한 시골 읍내의 느낌과 아까와는 낯선 언어로 된 표지판을 보면서, 내가 슬로베니아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슬로베니아라는 것을 인지 할 때쯤 버스는 한참 잘 달리고 있던 E61번 국도를 빠져나와 어느 조용한 정류장에서 멈춰 섰다. 잠깐 나와 쉬면서, 이곳이 어디냐 물어보니 블레드라는 슬로베니아의 유명한 관광지라고 했다.


나는 기왕 한번 어긋난 거, 모르겠다 라는 마음에 여기서 내리겠다고 하고 짐을 내렸다. 버스가 떠난 뒤 둘러보니 어두운 저녁에 불빛조차 희미한 블레드 기차역이었다. 작은 펍에서 불이 켜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펍에 들어가 물어본 후 버스정류장을 찾았고, 호수로 가는 버스를 탔다. 10분쯤 갔을까? 블레드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조명이 보이고,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겨우겨우 블레드의 한 호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변수가 있었지만 변수를 맞서거나 즐기거나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이 당시 나를 돌아보면 단순히 나의 탁월한 선택에 감탄만 했었지만, 지나서 보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맞는 좋은 보상이 나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변수가 생기고, 그에 따른 판단을 해야 된다. 그 판단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그 판단의 결과가 두려워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 물론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분명히 생기지만, 아주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그른 선택이 아니라면, 나중에 돌아보면서도 그때의 감정 등이 더 기억에 깊이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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