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벗들이 있기에
내가 처음으로 민중문화를 접했던 것은 대학 합격 후 예비 새내기 때였다.
(그보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노래들은, 나중에 '민중가요였구나' 라고 깨달은 것들이니...)
나는 대학 합격 후 한창 예비 새내기 싸이클럽에서 알게 된 친구에게 이끌려
새터 때 공연하게 되는 새내기 문선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곧 고등학교 졸업할 나한테 '새터', '문선' 단어는 생소했지만, 이 생소함을 즐기는 것도
나이 앞자리 바뀐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문선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생소함보다는 충격적이었다.
세션에서 느껴지는 촌스러움은 물론이고, 가사는 또 왜 그런지...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좋은 노래'의 기준에서 전부 벗어나는 노래였다.
새터 공연을 마칠 때까지, 나는 이런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고, 질문만 늘어가다 마무리되었다.
이후 총학에서는 같이 일하자고 문선단 친구들에게 권유를 했지만, 나는 흥미 없어서 나왔다.
그렇게 문선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는 듯했다.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려 가톨릭학생회에 가입했다.
동아리 방에서는 가톨릭 청년 성가와, 민가들이 수록된 책이 있었는데, 그동안 성당에 다니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 책에서 아는 노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을 한번 쭉 보게 되었다.
별 기대 없었는데 한 노래의 가사가 익숙해 기타를 들고 쳐보니, 문선 출 때의 그 곡이었다.
그걸 본 동아리 선배는 '네가 어떻게 이곡을 아니?'라는 식으로 묻더니, 결국 나를 노래 한곡 안다고, 서가대연 노래패에 가입시켰다.
이것이 내가 민가를 알게 된 이야기였다.
이렇듯 내가 민가를 부르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면 문선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나는 사실 문선을 많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요즘도 문선단 때 췄던 노래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손이 들썩들썩 움직인다.
가사를 곱씹고, 의미를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담아 전달하는 것이 노래패의 교감방식이라면,
머리를 비우고, 공허함에서 서로 만나 몸짓으로 하나 되는 방식이 문선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나는 전자가 좋아서 지금까지 노래를 불렀지만, 서가대연 행사 때마다 문선을 배우고 다 같이 추는 광경을 보면, 문선의 매력에 안 빠질 수가 없다.
벗, 동지, 함께 등등의 단어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문선으로 인해 익숙하다. 갠플이 편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금의 대학문화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또 그런 사회일수록 더 문선 같은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오늘의 노래는 문선을 설명하는데 가장 어울릴 노래이고,
내가 새내기 문선단 때 췄던, 그리고 노래패에 들어가게 된 노래인 우리나라의 "벗들이 있기에"다.
돌이켜보면 지난 나의 삶이란
벗들이 없인 얘기할 수가 없네
더불어 항상 참된 삶이 무언가 고민해온
벗들이 있기에 나도 있다오
벗들이 있기에 투쟁은 더욱 아름다운 것
이제 승리는 바로 저기 와있네
벗들이 있기에 청춘도 밝은 빛을 내는 것
찬란한 조국과 함께
오늘이 우리에게 비록 시련이어도
우린 활짝 웃으면서 내일로
눈부신 새 아침에 가슴 벅찬 통일에
얼싸안을 나의 벗들이 있기에
이번에 우리나라 콘서트에서 불렀던 벗들이 있기에!
16년도에도 어김없이 불러지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