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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Jul 07. 2020

108배

빨래를 너는 중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어진 나의 길


- 유재하, 가리어진 길 -


빨랫대에 양말을 걸던 손이 멈추고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머릿속에는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한창 정신이 없어 아이들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다가

결국, 할아버지가 떠나고 말았다는 부고를 알리던 날이었다.


그동안 할아버지의 안부도 잘 안 묻고 온라인 수업을 비롯한 자신들의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 같던 큰아이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울먹거리며 나에게 안겼다.


"엄마, 나 할아버지 병원에 계신 다음부터 내내 자기 전에 108배했어. 내가 그렇게 하면, 깨어나실 줄 알았어. 내가 엄마에게 절한다고 말하면 효험이 없을까 봐, 그래서 혼자 조용히 했어. 그런데 그게 하나도 소용이 없었네. 엉엉"


시어머님이 독실한 불교라 절에 몇 번 같이 갔었고, 시아버님의 제사도 절에서 지냈으며 나도 운동과 명상 겸 가끔씩 하던 108배를 아이도 곧잘 따라 하곤 했었다. 제대로 종교를 배우지 않은 아이에게도 108배는 간절한 기원의 의미였던 것이다.


아이 앞에서는 의연한 척, 며칠 동안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나는 아이의 108배 이야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이를 꼭 끌어안고 한동안, 오랫동안 같이 눈물을 흘렸다. 태어나 1년 동안 자신을 손수 키워주고 그다음에도 줄곧 자신을 좋아해 주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10대가 된 지금도 기억하는 아이다. 진작에 뇌졸중과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 대신 요리에 취미가 있던 외할아버지의 음식은 아이 입맛에 착 들어맞았다. 아이가 당신을 닮았는지 국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헤벌레, 뿌듯한 미소를 지으시던 아버지다.



한동안 잊고 있던 아이의 108배 사연이 유재하의 노래를 듣자마자 생각이 난 이유를 잘 알지는 못한다. 나는 새로운 집 환경에 적응하고 가끔씩 지인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며 웃고 떠들며, 그럼에도 혼자 있을 때는 계속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 속에 침잠하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문득문득 스치는 기억이나 자책감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릎을 꿇고 만다.


현실은, 일상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 일상 속 갑자기 찾아오는 서러움, 아쉬움, 안타까움, 그리움은 그 무심함 만큼이나 더욱더 큰 당황을 안긴다. 한 동안, 계속, 그럴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당황에 익숙해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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