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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Jul 17. 2020

꿈은 개뿔, 그냥 피신처

최근의 주어진 일들을 앞에 놓고 할까, 말까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문득 중학생 큰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예요?"

"....엄마 지금은 꿈이 뭔지 모르겠어."

"왜요?"

"글쎄."

"원래 꿈은 뭐였는데요?"

"작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길을 좀 잃었어."

"그렇다고 꿈을 포기해버리면 안 되죠! 끝까지 해봐야죠."

"사실 지금은 그게 꿈인지도 잘 모르겠어."

"다시 꿈을 생각해봐요. 엄마가 하고 싶은 일."

"흠, 몸짱이나 되어볼까? 우히히히히"


"넌 왜 꿈이 없니? 좋아하는 걸 생각해봐."라고 다그치는 부모와

잘 모르겠다며 흰소리나 하며 혼자 자조적인 웃음을 웃고 마는 아이 간의 흔한 대화가

우리 집에선 그 역할이 바뀐 채 오고 갔다.




엄마에 이어 아버지까지 보낸 후 난 솔직히 길을 많이 잃었다.

이전까지 내 안에 채워 넣으려 그리도 아등바등했던

이 세상 모든 지식과 담론과 사상들이 모두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문제나 법과 제도에 대한 공부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서 다시 들춰내기가 힘들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떠나버리는데, 도대체 뭐하자고 그 모든 것에 집착하는가.

난 비교적 건강하게 곁에 있던 아버지조차 지키지 못했으면서

뭐 그리 대단하게 살아보겠다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을까.


이 모든 허무함은 '글은 써서 뭐하나'라는 비아냥을 넘어

'나는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로 돌아왔으며

한 동안 나는 창 밖만 바라보거나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예능 영상이나 돌려보며 멍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최근 다시 컴퓨터를 열고 글을 쓰는 것이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감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술도 먹어보고, 혼자 울기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심정을 털어놓기도 해 봐도 결국,

결국 내가 피신할 곳은 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를 보내며 쏟아붓듯 글에 묻혀 살았을 때도

글은 내 피신처였다.

사람들에게 엄마의 사건을 알렸으면 한다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한다고,  

이 글은 이 세상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이야기라고 투사처럼 말하던 속 마음에는

'그래도 내 글이 못 읽힐 글은 아니지 않나'하는 덜 익은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 이전엔

"글로 숨어버릴 거야".

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어찌 보면 비겁한 회피였다.


아버지를 보내고 다시 쓰는 글이야말로 더욱더 비겁한 피신임이 확실해졌다.

엄마 때처럼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소리 지를 힘도 없고

원망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며 내가 무엇을 해야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픔이 해소될 수 있을지 아무런 길도 모른다. 그렇다고 글을 써서 용서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에, 그냥 숨는다.

그냥 글로 숨는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 일어나면서는 갑자기,

엄마가 떡을 먹고 숨이 넘어가던 CCTV의 그 장면이 떠올라 혼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훅, 맥락도 없이 기억이 나를 덮치려 할 때

그때마다 글로 숨을 것이다.


평안하기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제발, 이 글 안에서는 안전하길 바랄 뿐이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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