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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Mar 20. 2021

언행불일치

엄마가 한창 요양원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설이었던가, 추석이었던가. 어느 명절을 앞둔 주말 즈음에 엄마를 보러 갔다가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요양보호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나와 그들은 이전부터 친해져 엄마 증상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던 관계였다. 나는 그들을 나름 '돌봄 전문가'로 대우하면서, 전문가적 답을 구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명절에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게 좋을까요, 아님 안 데리고 가는 게 좋을까요? 물론 우리야 명절만큼은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은데 이미 요양원에 익숙해진 엄마가 집에 가면 평소와 다른 이부자리와 환경에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요양 보호사의 답은 내가 원하던 것과는 달랐다.


"집으로 데려가시는 게 좋죠. 데려가 봐야 식구들도 우리 보호사들의 고충을 알지."


환자인 엄마 중심에서 어떤 선택이 좋을지 궁금해서 질문을 던진 나는 그 보호사의 대답에 황당했다.


"에잉, 보호사님들 힘든 거야 다 알죠. 저희는 아버지랑 저랑 몇 년 동안이나 엄마를 돌보다, 돌보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여기 온 건데요. 다 알아요, 보호사님들 힘든 거." 


이런 내 대답은 전적으로 사실이었지만, 보호사들을 치켜세워주려는 의도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내 말에 이어 보호사는 답했다.


"그렇다면야, 뭐, 식구들 편하신 대로."


결국 엄마를 위해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는 알지 못한 채 엄마를 집으로 데려와 명절을 보냈었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엄마를 요양원에 맡기는 경험을 통해서 이 세상 그 어느 일보다 돌봄 관련 직군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못 돌보는 내 식구를 돌봐주는데 왜 고맙지 않으랴. 그래서 엄마가 요양원에 있을 때 보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선물도 갖다 주고, 우리 엄마 잘 돌봐달라고 아양도 떨고 그랬다. 그분들이 이렇게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나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내가 그걸 이해한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했었다.


모든 게 다 어그러져버렸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려 했는지, 얼마나 존중했는지에 대한 사실들이 한순간의 사건으로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나는 물론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요양원 대표 때문이고, 돌봄 노동에 지급하는 저렴한 급여 때문이고, 요양원 환자 한 명에게 배당된 적은 인원 때문이라는 것을. 다 관리 감독의 문제고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요양보호사에 대한 소송을 멈출 수가 없다. 그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이 소송을 통한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르게 터뜨릴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소한 대상은 요양원 대표와 요양보호사들이다. 어떻게든 합의를 노리는 대표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요양보호사들은.... 단 한 번이라도 개인적인 연락을 취해와서 미안하다고 사과 한 번 한다면 용서할 마음이 있는데, 나도 그들의 고충을 아는데, 그들은 그걸 안 한다. 그들은 나를 두고 괴물이라고 말하겠지. 엄마의 죽음으로 한몫 잡으려고 소송을 취하하지 않는 나쁜 악질로 생각하겠지. 가슴이 아프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이들을 내 손으로 고소한 이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언행불일치. 이 말에 세상 가장 어울리는 것이 지금, 바로 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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