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술에 대한 애착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조금 다르게 작용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진한 피로감이 동반되면 뭔가, 머릿속에서 스위치가 ON,하는 느낌이 들면서 자동반사적으로 술이 당기는 것이다. 책 <감정식사>의 저자인 수잔 앨버스는 ‘내가 먹는 대부분의 것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그렇게 감정적으로 찾게 되는 음식이 술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중독이라는 것을. 하지만 외면했다. 하루 한 병의 술을 드시는 아버지도 아직 건강하게 사는데, 중독이라 한들, 그게 무슨 문제일까.
밤에 아이들이 잠들고, 이른바 육퇴(육아퇴근)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TV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땄다. 달디 단 것이 술맛인지, 아니면 그 시간의 맛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두 가지는 꼭 함께해야 했다. 엄마가 뇌질환으로 쓰러지고, 병세가 깊어지고, 엄마에게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더 많아지면서 나는 음주를 더욱더 정당화시켜 갔다. ‘어린아이들도 키우며 엄마도 돌보면서 내가 이렇게 애를 쓰는데, 술 한 잔 마음대로 못 마시겠어?’라는 자기 연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정당화의 더 큰 근거는 뇌질환을 앓는 것이 술꾼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사실이었다. 술 한 잔만 입에 대도 어지러워하던 엄마가 전혀 다른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술을 마시며 수시로 화를 풀고 사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것이라는 나만의 ‘지론’이 생겼기 때문이다. 3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나에게 술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였고 현실을 잊게 하는 망각의 유희였다.
엄마를 돌보다가 스트레스를 엄청 받은 어느 날, 하필 저녁에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또 소주를 멈추지 않고 마셨다. 기억이 가물해지고, 친구들의 연락으로 남편이 나를 데리러 와서 집에 누운 다음 날 기억이 났다. 술에 취해 내 주장을 강하게 펴다가 자리에 함께 한 선배가 기분이 상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것을. 다음날 사과했지만 선배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내가 어느 정도로 잘못을 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선배가 예민해서 내 말을 왜곡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로 그 선배에게 잘못을 하고 예의 없게 군 것인지. 기억이 안 나니 추가적인 사과도 변명도 더 할 수 없었다. 그 선배와는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안 한다.
요양원 부주의로 엄마를 떠나보낸 지 3개월 후 아버지의 사망이 뒤를 이었을 때, 그때 나는 온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이전까지 건강했고 지병도 없었기에 더 황망했다. 소소한 대화와 맛난 음식을 나눠 먹던 나의 술스승, 아니 술친구인 아버지와 다시는 함께 잔을 기울일 수 없게 된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며칠 후 나는 혼자서 와인을 계속 들이켰다.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술을 더 사다 달라고 조르는 내게 남편은 그만 마시라며 말렸다. 세상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느낄 만큼 격한 자괴감이 솟구치던 순간이었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집 밖을 뛰쳐나갔다. 엄마를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아버지를 보내나. 천하의 불효자가 된 기분에 딱 죽고 싶었다. 결국 죽을 수가 없어서, 죽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한참 만에 집에 들어왔다. 며칠 후 남편을 원망하며 말했다. “그날 술을 사다 줬으면 난 그냥 더 마시다 집에서 쓰러져 잠들었을 거야. 왜 그만 마시라 해서 화를 돋운 거야? 난 정말 그날 죽을 뻔했다고.”
20대 때의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에는 자조적이었으나 엉뚱하고도 유쾌한, 무용담 같고 시트콤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된 육아와 엄마의 병환으로 인한 괴로움에 술을 마신 40대 이후의 에피소드에는 그런 게 없다. 술을 탈출구로 삼았으나 언제나 현실에 갇혀있었고 위로의 도구로 삼았으나 마실수록 가슴을 긁어댔다. 성인이 된 후 스트레스 해소 도구였고 만남의 매개였으며 좀 더 깊은 관계로 향하기 위한 윤활유였던 술은 이제 정반대의 결과만 남긴 채 나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50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는 술을 끊었을까? 증오는 언제나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이 다시는 그를 안 본다는 말은 아니라는 설명으로 답을 대신할까 한다. 하지만 먹는 횟수와 양이 현격히 줄긴 했는데 그건 증오 때문은 아니다. 술을 마시면 몇 년 전 생긴 허리 통증이 도지고 숙면을 방해받는 날이 늘어나면서 술을 향한 무람한 마음이 생긴 것뿐이다.
도서관에서 <작가와 술>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펼쳐 들었다. 일상에서의 스트레스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요즘, 50대부터는 술에 대한 마음가짐을 어떻게 정립할지 고민 중인데, 그 기준을 정하기 위해 ‘나=작가’라는 기본값을 설정해 보았다. 술을 마시다 피폐해진 작가, 그러나 수작을 남긴 작가, 그럼에도 술을 끊고 더욱 위대한 걸작을 쓴 작가들의 이야기를 탐닉해 보며 이제는 없는 아버지 대신 내 인생 두 번째 ‘술 스승’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