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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Sep 13. 2024

오늘만 사는 자.알.못.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자연, 식물, 농사 등에 익숙지 않아 소위 ‘자알못(자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마음이 쪼그라들 때가 있다. 이 나이까지 도심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커리어우먼의 자리를 지속하고 있었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려나. 주로 집에서 살림하고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 주제에 약하다는 것이 조금씩 불편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식재료로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식물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그렇고 나이 들면 꽃이 좋아진다고, 오십 대 이상의 주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산을 타거나 숲해설가 교육을 시도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 것에도 괜한 위축감이 들곤 한다.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자연과 친한 몸’이 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동네 산기슭의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텃밭 농사에 도전했지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동안 쪼그리고 앉거나 작물을 살피러 허리를 굽히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텃밭을 자주 찾는 것도 일이었다. 봄에는 그나마 의욕이 앞서 주말마다 찾아갔지만 날이 더워지자 뜨거운 태양 아래 산기슭을 걸어 밭까지 도착하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웠다. 자진해서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던 유치원생 큰아이가 햇빛 아래서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나는 속으로는 ‘마침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 아이에게는 “그러게,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라고 짐짓 가르치는 척을 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장맛비를 핑계로 발길을 미루다 보니 밭을 분양받은 1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방치한 채 농사는 흐지부지되었다.      


몇 년 전에는 괜한 동경심에 주택살이를 시도했다가 전세 기간 2년 동안 호된 고생을 치렀다. 멀리 가지 않고도 집 마당에서 종종 바비큐를 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손재주도 없고 사부작거리며 정원을 가꾸는데 영 관심이 없는 우리 부부는 풍성한 비와 바람, 태양 아래서 속절없이 키를 키우는 잡초를 잘라내는 일로 여름을 다 보냈다. 눈이 올 때 앞마당을 쓸어야 하는 겨울의 괴로움까지 두 해 반복한 다음 그 집을 떠나오며 깨달았다. ‘자연이란, 멀리 있을 때 아름다운 것.’     


풀 베던 2년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이사한 현재의 집은 제법 조경이 잘 가꾸어진 아파트다. 다양한 수종이 있다 보니 계절마다 달라지는 꽃들을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특히 수국과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마다 홀로 요염하게 피는 꽃들보다 하나의 송이에 작은 꽃이 여럿 맺히는 것이, 왠지 타인 없이 살기 힘든 인간들의 공동체와도 같달까. 나는 자연도 ‘자연’스러운 것보다 ‘인간’스러운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온다. 문득, 꽃을 향해 나도 모르게 사진기를 꺼내 드는 자신이 생경하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가까이 있는 자연이 아름답게 보이는 거지? 결국 나도 꽃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는 것일까?  

    

아, 알았다. 가깝건 멀건 ‘내가 키우지 않는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었어. 내 책임이 닿지 않는 것. 나와 상관없어서 예쁜 것. 분갈이도 제대로 못 해주고 일주일에 한 번 물 주는 것도 잊어버려 서서히 말라가는 집 안의 화분을 향한 미안함이 공동 정원의 식물에게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때로 내 자식이라면 꿀밤 한 대 쥐어박았을 바보짓도 남의 자식이 하면 귀엽게 넘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일이 그런 듯하다. 모든 것은 다 책임의 문제고 책임이란, 그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갑자기 어른다운 책임감이 불끈 솟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나이면 당연히 해내야 할 것 같은 일도 성격에 안 맞으면 도망치고야 만다. 나이가 들면서 책임감이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도망쳐도 별문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게 젊은 날과 가장 큰 차이인 듯하다.  

    

그나저나 지금보다 더 심각한 기후 위기가 도래할 미래 시대에 AI 기술보다 더 필요한 것은 농사 기술이라고 하던데 내 책임하에 단 한 포기의 식물도 허용하지 않은 채 아직도 깔끔하게 손질된 마트 매대의 채소만 고집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미래를 맞으려나. 자연이란 주제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진정 ‘오늘만 사는 사람’이다.


*9월 17일 화요일 연재는 하루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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