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통해 알게 된 어른되기 숙제
언제부터인가 ‘어른’이라는 단어가 입 속을 맴돈다.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더욱 욕심이 나는 단어다.
작년에 접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울림이 컸다. 저렴한 약값으로 한약방을 운영하고 평생의 사재를 털어 고등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이 드러나길 꺼려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 다큐를 본 이들 중 누구라도 김장하라는 이름 앞에 ‘어른’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 전혀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면 많은 중년들이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내 가족만 바라보고 지내던 시선이 사회로 향하는 것이다. 나도 비슷한 단계인 듯 하다. 아이들이 성인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이제 어떤 어른으로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아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어른’이 될 수나 있을지 가늠이 안 된다. 내 돈을 사회에 헌납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하는 행동이 사회에 일말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니, 폐라도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문제는 언제나 나와 내 가족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스무 살이 되어 다 키워놓은 것 같은 아이들도 온전히 자신의 삶을 책임질 때까지 경제적, 정신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자식밖에 모르는 소위 ‘헬리콥터 맘’이 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의 독립을 돕는 그 적당한 수준을 결정해야 할 텐데 내 자식의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노후 준비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더 나이가 들면서 먹고 살 일과 아플 때 들어갈 병원비까지 계산하면 그 얼마를 벌어도 부족할 것만 같다. 내 생활을 우선하는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사회적인 ‘어른’으로 늙어갈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가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며 이 나라의 보육과 교육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생겼고 살림을 하면서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치매 엄마를 지켜보며 나이듦과 돌봄, 복지 관련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내 문제가 사회문제로, 사회문제가 내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이 바로 행동의 첫걸음이리라 생각하는, 지금은 이 정도 단계까지 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름 역경이 있었던 내 가정생활 20여 년은 사적인 괴로움 혹은 보람만 남기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시간이 내게 던져 준 그 문제의식이 마침내 어느 곳으로 흘러가 닿아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면서 50대를 맞이하고 싶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