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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Sep 27. 2024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가족을 통해 알게 된 어른되기 숙제

최재천 교수는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했고 나 또한 동물에는 그 생각이 적용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반대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건 오히려 ‘그를 잘 알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대로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나이 스물아홉 때, 엄마는 서른을 넘기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나에게 수 차례의 선 자리를 내밀었다. 아마 오랜 지인인 한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사례를 받기로 하고 여기저기서 남자들을 수소문해서 자리를 마련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만났던 남성들이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집안에서 뒹굴거리는 게 취미고 먹고 마시고 잔다는 말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뱉는 비만의 회사원, 강남 밖으로는 거의 나가기 싫다며 거들먹거리던 대학 강사, 일상 대화시 욕설이 입에 붙어 있던 건설회사 아들, 이야기가 잘 통해 에프터를 신청하려나 기대했는데 ”유리씨 되게 좋은 분 같아요.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남자 만나시기 바랍니다.”라는 황당 문자로 돌려차였다는 느낌을 준 사람 등이었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맞선의 시기를 보내고 내 안에 확고한 이상형이 생겼다. 바로 ‘정상인’. 맞선 본 남성들의 이상한 점들이 내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이른바 정상인만 만나면 애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듬해 그런 ‘정상인’을 만났다. 지금의 남편이었다. 보통의 몸매에 보통의 키, 보통의 얼굴이었다. 말투도 목소리도 보통. 대화를 나눠보면 나와 말이 통하는 정도도 그럭저럭, 보통이었다.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맞선에 나왔던 ‘비정상인’과 비교하다보니 그의 가치가 더 높아 보였다. 서른을 넘긴 나이도 영향을 미쳤는지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정하고 1년 만에 식을 치렀다.     


정작 결혼 후에는 ‘과연 이 사람과 왜 결혼을 했을까?’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서로 다름을 느낀 적이 많았다. 스물아홉살의 ‘비정상적인’ 사람들과의 선 자리 때문에 반대급부적으로 이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짧게 만나고 결혼한 남편의 모습에서는 문화 충격 마저 느꼈으니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365일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결혼 전 몇 시간씩 만나 데이트를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결혼 후에야 알게 된 서로의 모습을 미리 세세히 알았다면 과연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부부가 그렇듯 지금 남편과 나는 연애 시기의 설렘보다는 가족 간의 진한 의리와 동지애를 느낀다.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갔고 그 과정에서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화해로 귀결될 때마다 더 깊은 애정으로 진화함을 느꼈다. 지금도 그가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또 다시 ‘욱’ 치솟는 화가 있지만 이제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지’ ‘오죽하면 그럴려구’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며 연민이 샘솟기도 한다.      


최근 글쓰기 수업을 했을 때 50대 후반 수강생이 ‘다시 사랑에 빠져보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이 글을 남편이 볼까 두렵다’고 말했다. 가족과의 타성에 젖은 공생 관계가 아닌 소녀다운 핑크빛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그 감정을 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그분의 태도에서 중년에게 사랑이란 어디에서 찾고 느껴야 할지 생각해본다.      


설레고 떨리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상대에게 드는 그런 직관적인 느낌만으로 가슴이 충만해져 “사랑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던 젊은 시절에 비해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기까지 참으로 많은 생각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과연 이것도 사랑인가?’라는 의심도 자연스럽다. ‘사랑은 무슨, 전우애지.’라는 농담에 절절히 공감하면서도 한편, 그 또한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될 이유도 찾지 못한다. 20여 년간 쌓아 온 시간만큼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게 되어 무덤덤하고도 편안해진 우리. 앞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늙어갈 이 사람과의 관계에 오글거림과 닭살의 괴로움을 조금만 참아내고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용기를 다시금 내볼까 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남편에 대해 최재천 교수의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적용하는데 망설임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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