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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Sep 30. 2024

그의 독립을 기원하며

가족을 통해 알게 된 어른되기 숙제

남편에게 느낀 문화충격이란 주로 집안일의 역할 분담과 관련된 것이었다. 남편은 인상도 좋고 서글서글한 면이 있어서 지인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을 받지만 내게는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에게 가진 불만이 있다. 바로 집안일에 관심이 없고 집안 내 역할에 대한 생각이 나와 많이 다르다는 것.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는 자라온 환경과 교육을 무시하기 힘들다.     


내 아버지와 친오빠는 둘 다 요리를 자주 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온 나에게는 부엌살림에 남자가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시댁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나보다. 시어머님은 다른 면에 있어서는 꽤나 열린 생각을 가져서 자식들과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지만 집안일의 역할 분담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다. 당신도 유교적인 대가족 안에서 자라오셔서 남자들은 절대로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로만 아셨고 또 그런 방식으로 아들 셋도 키워오셨다는 것이다. ‘아파트에서 쓰레기 봉지를 왜 남자들이 들고 가는지 신기했다’고 말씀하셨던 어머님은 그러나 권위적인 성격은 아니시기에 지금은 세상 변화를 이해하시려 한다.  

    

신혼 때의 남편은 빨래를 걷으라는 내 말에 짜증을 내며 ‘너는 자취를 많이 해봤지만 나는 아니야. 내가 해야 돼?’라는 말로 나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집안일을 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고, 그게 자신은 아니라는 말 아닌가? 선한 인상에 그렇지 못한 언사를 내뱉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나도 아니었다. ‘왜 같이 사는 집에 한 사람만 집안일을 하냐’며 왜 집안일을 나눠서 해야 하는지, 요리를 못한다면 빨래나 설거지는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조목조목 따지고 하나하나 설명했다. 하지만 30년이 넘게 다른 방식으로 살던 사람이 한 번에 바뀔 리는 없었고 수 차례 잔소리를 하거나 ‘콕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먼저 찾아서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남편에게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결혼생활 중 가장 피곤한 일 중 하나였다.      


집안일에 대한 남편의 편견을 깨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좀 자란 후 온 가족이 앉은 저녁상에 오랜만에 정성껏 요리를 해서 내놓은 어느 날, 남편의 말은 또 한 번 내 화를 돋웠다.

“와, 맛있겠다. 우리 딸들도 이렇게 요리 잘해서 나중에 엄마처럼 예쁨받는 아내가 되야 해~”

이 무슨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내가 “그게 딸들 앞에서 할 소리야?”라고 소리쳤지만 남편은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다정한 말투로 요리를 칭찬했는데 도리어 핀잔을 들은 격이니. 남편은 ‘선한 의도를 가진 좋은 사람’이다. 단지 문제의식과 감수성이 나와 다를 뿐.      




솔직히 여성으로서, 그리고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성역할, 나아가 페미니즘은 항상 관심을 두는 주제고 생활 속 많은 부분에서 올바른 방향성을 가늠하려 노력하지만 집안일에 관해서 거대한 페미니즘적 담론을 꺼내 들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집안일이란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돌봄이라고 생각한다. 성한 몸이라면 자신이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제반 사항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딸들에게 요리와 살림법을 종종 알려주는 것은 딸이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배워야 할 필수적인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집안일은 바깥일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다. 집안일은 ‘집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남편의 ‘살림력’은, 아이를 낳고 내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 힘들게 되었을 때 한 단계, 또 주변의 도움도 없이 아이 둘을 키우느라 부부 둘이 번갈아가며 복직과 휴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병을 앓는 엄마를 돌보려고 내가 친정에 왕래하느라 바빴을 때 또 한 단계씩 높아져 갔다. 그리고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요리는 여전히 잘 못하지만 청소와 빨래, 쓰레기 버리는 일 등은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나는 남편이 내가 없는 집안에서도 스스로 밥을 해 먹고 빨래와 청소를 하며 지낼 수 있는 수준이 되기를 기대한다. 60대에 뇌질환을 겪은 엄마처럼 나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집안일에 있어서는 젊을 때 의존적이었던 남편이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독립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 또한 중요한 노후 준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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