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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언니 Jan 03. 2022

우리 아이는 ADHD가 아닙니다.

둘째 아이 이야기 

“여기요 이 집 아들 아닙니까?” 

비가 오던 어느 여름날 기저귀만 하고 나가서 돌아다니던 아이를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서 데리고 오셨다. 두 돌도 되기 전의 우리 둘째 아들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 당시 4동짜리 사원아파트에 살았다경비아저씨도 아시고 동네 주민들도 알 만큼 우리 아들은 잘 돌아다녔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엔 더 그랬다.      

 예민한 큰애와는 달리 둘째는 잠도 잘 자고 잘 먹고, 자고 일어나 울지도 않고 너무 편하게 

잘 자라주었다. 단지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고 집을 어지럽히고 난장판을 만드는 날의 연속이었다. 겁도 없이 순간순간 하는 행동들 때문에 4살 때부터 왼팔 오른팔 번갈아 가며 깁스를 해야 하는 상황들도 있었다. 다치는 날도 많아서 늘 조바심을 갖게 했던 녀석이다. 어리니까 그렇겠지 크면서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 이 녀석을 키웠다. 


 시간은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아들의 초등학교 적응기는 아이보다 엄마인 나에게 더 혹독한 시간이었다. 선생님 호출로 학교에 자주 불려가는 엄마가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비 오는 날의 감상을 좋아하던 나에게 이제 더 이상 비 오는 날은 그렇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괜히 아이를 더 단속해야 할 것 같고 내 심장은 더 벌렁거렸다. 아이가 쉬는 시간에 나가서 비 맞고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선생님 말씀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우리 아이가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지? 라는 고민으로 엄마에게 전화해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다. ‘잘 키우고 싶어서 노력하는 엄마였는데, 일한다고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걸까? 그렇게 나를 자책했다가도 아니야 그럴 수 있어. 이제 여덟 살이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좋아질 거야.’라고 생각을 전환했다가도 마음 줄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떻게 그 순간을 보냈는지 사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째는 딸이다. 학교 다니면서 엄마를 학교에 불려오게 하는 일이 없었다. 첫째와 18개월 차이로 태어난 둘째였다. 7살, 1년을 유치원이 아닌 스포츠단을 보냈었다. 워낙 활동성이 많은 아이였다. ‘혹시나 그것 때문일까? 차분히 앉아서 공부하고 규칙을 배우게 해야 했나?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너무 통제하지 않아서일까?’라는 고민도 했었다. 

 2학기가 되어서는 더 자주 아이가 반성문을 써오기 시작했다. 운동회 연습을 하는 때였다. 규칙이나 짜인 습관을 힘들어하는 나의 아이는 줄 서서 율동 연습하고 시키는 것을 따라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지 많이 혼나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반성문에 어느 날부터인가 사인을 하는 게 싫어졌다. 이런 것도 반성문을 써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선생님의 기준이었지 나의 기준과는 달랐다. 

“수업시간에 뒤돌아보고 친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수업시간에 지우개 가루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옆 친구와 말을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등등 누가 보기에도 너무나 사소한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적하는 선생님의 그 기준에서 내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가 되지 말자. 내 아들은 내가 지킨다. 생각을 조금 바꿔 강해지는 엄마가 되고 아이를 지키고 아이를 믿어주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교권을 침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사랑과 관심보다는 질책으로 대하는 선생님에게서 내 아들을 지켜내야 하는 건 당연한 엄마의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이 친구 엄마로부터 비슷한 고민과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던 거였다. 그 아이도 우리 아들과 비슷하게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그렇다. 선생님에겐 그저 얌전하고 말 잘 듣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아이가 좋은 아이였던 거였다. 우리 아이와 그 아이는 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문자메시지 속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고 긴장된 모습으로 교실 칠판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문자 내용에는 학교 살구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부러트렸으니 같은 나무를 사다가 심어 놓아야 할 것 같다는 내용과 시간이 괜찮으시면 학교에 방문해 달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컥했다. 아이가 한 잘못 보다는 나뭇가지를 들고 칠판 앞에서 무섭고 두려운 얼굴로 서 있는 내 아들 때문이었다. 그때 확실히 나는 그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은 없어졌고, 빨리 2학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무를 사다가 심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어떤 행동 뒤에 가장 중요한 건 그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지도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한 것이지, 너의 잘못을 엄마에게 이렇게 알릴 거라고 경고하듯 사진을 찍는 선생님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한 내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학교에 갔다. 친하다고 했던 그 친구의 엄마도 와 있었다. 두 아이가 같이한 것이다. 그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사실은 ‘선생님 그 사진을 왜 찍으신 거예요?’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고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은 학교의 과실을 따는 것은 도둑질이고 그만큼의 잘못을 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아이들이 산만하니 두 아이의 어머님들께서는 아이들 ADHD 검사를 받아보기를 권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그날 상담 갔던 두 엄마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진단이었다. 호기심 많은 두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도둑으로 몰려야 했다. 잘못을 한 건 알지만 그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처럼 과연 스스로 통제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모두 ADHD일까?      


 아이 친구 엄마는 그 아이가 첫째였고, 나는 둘째였다. 큰애를 먼저 키워본 엄마여서일까 내가 아주 조금은 더 담대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검사를 했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검사를 하지 않았고 그저 밝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내 아이로 키울거야 라고 결심했다. 두렵기도 했다. 정말 ADHD일까.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아도 내 아이가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그때 나의 결단이 옳았다. 지금 두 아이 모두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검사받고 약을 먹었던 내 아들의 친구도 그렇지 않았던 내 아이도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들로 잘 자라왔다. 


그 후로도 아주 다양한 사건들은 많았다. 우리 아들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 이런 아이가 나중에 더 잘 돼요.” 그 말씀 한마디로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다시 생각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 운이 없었던 걸로. 모든 선생님이 다 선생님 자격을 갖추고 아이들을 지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분이기도 했다. 지금 어디에 계실지 모르겠다. “선생님 저희 아이는 ADHD가 아닙니다.”라고 소식을 전하고 싶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에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사랑해” 다음으로 “엄마는 너를 믿는다.”였던 것 같다. 나의 믿음만큼 내 큰아들은 의젓하게 잘 자라고 있다. 같이 울었던 날들도 많았고 같이 힘들었던 날도 많았지만, 그날들 모두가 소중하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그런 말을 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자꾸 엄마 힘들게 해서”라고. 그때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바보라고 해도 엄마는 천재라고 할 거야. 엄마가 지켜줄게.”라고. 어릴 때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이 녀석이 지금은 나한테 제일 잘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학교 가는 길에 내 볼에 입맞춤을 해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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