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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언니 Jan 03. 2022

엄마 나 사실 그때 외로웠어.

첫째아이 이야기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 3학년의 세 아이를 불러 모았다. 그 아이들에게 동생 소식을 전해야 했다. 셋째 출산 후 10년 만에 생긴 넷째 아이의 존재, 계획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더불어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임신 소식을 접하고 아주 당황스러웠지만, 가족회의를 통해서 모두의 반응이 긍정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집했다. 

 첫째 딸의 반응이 제일 두려웠다. 미안했다. 남동생 둘을 연달아 만나며 엄마에게서 가장 먼저 독립해야 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습을 볼 때 싫다고 말하지 않을 것을 예상은 했었다. 아이들 반응은 놀라웠다. “당연히 낳아야지 엄마! 우리가 같이 키우자.” 그렇게 나만 빼고 아빠부터 세 아이 모두 새 생명의 소식에 기뻐했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남편뿐 아니라 세 아이에게 귀한 존재가 되었다. 


 새 생명을 품은 귀한 존재로, 아이들은 더 스스로 엄마로부터 독립해서 할 일을 하고 엄마를 돕기 위해 애써 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것부터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까지 바로 바로 챙겨주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임신 초기 입덧으로 너무 힘들어하며 밤마다 변기를 붙잡고 토할 때 “엄마 이렇게 언제까지 힘들어야 해.”라고 묻던 둘째는 계속 이렇게 힘든 거면 동생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하며 내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잘 자란 아이들 덕분에 임신 기간도 행복했고 태어나서도 이 녀석들이 있어서 내 육아는 조금 덜 힘들겠다는 생각으로 든든했다. 


 시간이 흘러 모든 날을 채우고 출산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중2, 중1,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친구나 지인들의 아이 중 이 시기에 엄마랑 말도 안 하려고 하는 사춘기를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우리 집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꼬물꼬물 아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동생을 신기해했고, 동생을 보기 위해서 집에 일찍 일찍 귀가했다. 

 마흔셋 늦둥이를 낳은 나는 몸이 힘들었다. 출산의 고통은 이미 세 번 경험해 봐서 알았지만, 산후 회복은 세 아이 때와는 다르게 더디고 힘들었다. 모두가 이쁘다고 하는 그 아기가 60일쯤 돼서야 이쁘게 보였던 것 같다.     

 사춘기의 원인은 아이에게만 있지 않다. 그쯤에서 엄마들은 아이들의 달라지는 행동에 더 많이 반응하고 그 반응이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게 더 많아서 아이들과 부딪히고 다투게 된다. 그 시기에 엄마가 하는 말은 아이들에겐 잔소리로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는 큰아이들에게 잔소리할 일이 거의 없었다. 아기를 낳아 본 엄마들은 알 것이다. 백일까지 정말 힘들고 그다음 첫돌이 되기까지 그 일 년 동안 에너지가 참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나도 그랬다. 하루라도 잠시라도 혼자 있는 게 참 힘든 육아였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돌아가며 육아를 했다. 분유를 타서 먹이는 것, 다 먹고 나서 등을 두들겨서 트림하게 하는 것,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 목욕을 시키는 것, 안아서 잠을 재우는 그것까지 다 배우게 했고, 다 함께했다. 이미 나중에 해야 할 자신들의 육아를 미리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목을 가누기 시작하면서 아기 띠를 해서 엄마 대신 아기를 재우고, 울면 돌아가며 안아주고 온 가족의 사랑으로 그렇게 아기는 자랐다. 1년이 지나 첫 돌잔치 때 내가 가장 감사한 사람은 삼 남매였다. 주변에서 그랬다. 너희 집 애들 같은 애들 처음 본다고 동생이 아무리 이쁘다고 해도 자기들 하고 싶은거 하고 돌아다니지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고 칭찬했다. 감사했다.      


그렇게 아이가 돌이 지나고 난 어느 날,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오겠다던 딸이 귀가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엄마, 나 오늘 82년생 김지영 보고 왔거든.” 중3이 되어 있던 큰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많이 성숙했다. 동생을 셋이나 본 덕분일까? 깊은 생각도 하고 있었고 정말 의젓하고 든든한 맏딸 역할을 아주 완벽히 잘하고 있었다. 물론 이 아이에게도 특별했던 일들이 많이 있기도 했지만 가장 믿음 가는 첫째였다.      

 ‘82년생 김지영’을 책으로 본 나는 그 내용을 알고 있어서일까? 딸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엄마가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도 엄마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주변에서 그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엄마가 손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픈 것들도, 우리를 어떻게 키웠을지도, 많이 알게 되었다고 자기 마음을 고백했다. “엄마 나 사실 그때 많이 외로웠어.” 전혀 생각을 못 했다가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언제?” “엄마 아기 낳고 집에 있을 때 나 중2 때…….”

 1년 전 자기 감정을 꺼내서 내게 고백하고 있었다. 왜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는 대답했다.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기를 두고 질투는 아닌데 그냥 엄마가 아기만 보고 있는 게……. 이게 질투의 감정은 아닌데....... 아무튼 그래서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툭 건드리거나 할 때 짜증도 나고 별거 아닌 일에 많이 울었었어. 그랬었다고. 지금은 괜찮아.” 너무 미안했다. 그 말끝에 난 이렇게 질문했다. “그때 왜 말 안 했어?” 딸은 다시 답했다. “엄마가 아기 보느라 힘든데 나까지 뭐 하러 그래.” 그 대답이 더 가슴이 아파서 아이를 잠시 안아주고 고맙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중2의 아이가 이미 커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도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였다.      


 그날 밤 큰애가 자라온 과정을 생각하며 잠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큰딸이 엄마 사랑의 크기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게 잘해야겠다고 말이다. 네 아이 모두에게 사랑을 같게 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지난 시간의 외로움을 고백해준 딸에게 고마웠다. 아이들을 내가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이 나를 키우고 성장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성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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