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에도 소환당한 직장인 = 아이에겐 VIP

회사에서도 브런치에서도 VIP가 아니면 어때! 내 새끼와 함께인데.

by 근노보

연차휴가(年次休暇)

법에 보장된,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권리’.

그러나 나에겐. 꼬오오옥 필요할 때 하필 쓰기 힘든, 일종의 레어템이다.


아이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수업이 있단다.

무려 한 달 전 공지를 들은 터라 해당일이 다가올수록 미리 '선제적 대응'을 해두었다.


고작 ‘하루’ 연차를 위한 선제적 준비는 꽤 품이 든다.
그 전주부터 업무를 쓸어 담듯 처리하고, 점심도 패스하면서 상위자에 차상위자까지 컨센서스를 미리 맞춰두어야 한다.

차상위자께 하찮은 나의 연차 일정을 보고드릴 수 없다.

그러니 진행 중인 프로젝트 일정보다 서둘러 마감을 얼추 지어둠으로써, 급작스러운 회의 소집이나 보고 일정이 생길 확률을 최소한으로 방어해 두었다.

내 딴엔 '이 날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암묵적 협정문을 나 홀로 체결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 회사 한정) 회사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으로 돌아가는 곳인지 뭔지..


저 윗선에서 예상치 못한 수정지시가 떨어졌고,
희한하게도 똘똘한 인력들은 다른 프로젝트에 들어가 있는 데다,
하필 이 업무에 그나마 익숙한 사람이 ‘나’ 뿐이란다.


결국 연차인 날 아침에 소환되었다.


입사 초기에 옆팀 누군가가 신혼여행에 노트북을 들고 갔다길래 ‘유난이네’ 싶었는데…
내가 연차날 아침, 책상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제 나도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더 정확히는 이 집단에서 제법 일부가 됐나 보다.


금일은 귀하의 연차 지정일입니다.
연차 중 근로를 할 경우, 근로기준법 제61조에 따라... 어쩌구 저쩌구 얼씨구 절씨구..


안내글을 읽을 여유도 사치다.

재빠르게 동의를 클릭하고 몰아치는 폭풍을 정면으로 맞이한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오전을 보내고 어느새 해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보고서 수정안의 완료 보고까지 마치니 상위자께서 “극히 마이너 하게 수정사항이 있다”며 대면을 하자신다.


막상 회의실에 들어가니 정말 나노 수준의 마이너 한 내용이다.

“여기에 뭐뭐 하는 ‘등’을 추가하고, 저기는 MS라고 표현하지 말고 시장점유율로 바꾸고…”


‘최종본 나오기 전에 워딩은 다시 한번 챙기겠습니다. 지금은 전체 방향성만 보시고…’

소리가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두었다.

‘대꾸하느라 시간을 소비하느니, 얼른 고치고 만다.’

남의 돈 받는 직장인이란 게, 참 야속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무실에 있던 임직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그 틈에 나는 택시를 잡았다.


한강 위 윤슬은 저렇게 반짝이는데, 내 얼굴엔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게 드리웠다.

세상은 저리 평온한데, 나만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며 사는 것 같아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다.

남 피해 준 적도 없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매주 나온다는 로또 한 번이 왜 나한테만 안 오는 걸까.


그렇게 허탈한 생각 끝에 도착한 어린이집.


문을 열자마자 입구 게시판에 우리 아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조금 전 피로와 허무가 스르르 사라진다.

아이는 나를 보자 아장아장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 순간 나는 ‘아등바등 고생하고 온 사람’이 아니라,
‘모두 해결하고 온 듬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회사에선 소환당한 직장인일 뿐이지만.

브런치에서 VIP로 선정되지 못한 흔(한)작(가)일 뿐이지만.


잊지 말자.

아이 앞에선 세상 든든한 VIP다.

단, VIP 대우는 사춘기 전까지 한정판일 테니 그때까지 최대한 즐겨보자.




다음 편 예고 : “회의실에선 치카, 주머니엔 육아가 있었다.
다 큰 성인에게서 튀어나온 “치카 좀 다녀올게요.”, 재킷 주머니에선 핑꾸 비타민. 예전엔 웃고 넘겼던 짤, 이젠 내가 바로 그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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