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선 치카, 주머니엔 육아가 있었다.

육아 어휘와 캐릭터 간식, 회사 생활에 침투하다

by 근노보

회사 생활 짤 중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카리스마 있고 과묵한 어느 팀장님께서 글쓴이를 꾸지람 끝에 “자. 그만하고 맘마 먹으러 가자”라고 해서 귀여우셨다는 글.


BC(Before Child) 시절엔 그저 “아, 귀여운 에피소드네” 하고 웃고 넘겼으나.

이젠 그 웃음의 당사자가 되었다.
왜냐.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 육아 어휘를 쓰고 있으니까.


예를 들면 출근길에 멀쩡히 정장을 차려입고 가서는,

재킷 주머니에서 ‘핑꾸(오해 마시라. 아이 발음을 모사해 보았습니다.) 캐릭터 비타민이 나온다.

나는 그게 없으면 아이와 외출 자체가 불가능한데.

옆자리 MZ 후배는 처음 본 굿즈라도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꺄악. 이거 너무 귀여워요!” 하며 좋아한다.

정장 주머니에서 캐릭터 비타민이 나온 이질감보다,

저 리액션이 더 당황스럽다.

유사 에피소드는 또 있다.

예전 같으면 식당에서 멘토스를 받자마자 동석자들에게 건넸다만 이젠 어림 없지.
내 건 내가 챙겨야 한다.
하원 후 귀가 중 아이가 걷기 싫다고 거리에 드러누우면, 즉시 꺼내줄 응급간식은 필참 중 필참이다.
삼겹살 집에서도 괜히 사탕 하나 더 챙기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참… 강산이 변했구나 싶다.


아이의 고열로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출근한 어느 날.
회의실에서 프로젝트 브리핑을 하고 있는데, 후배가 내 목을 힐끗 보며 물었다.
“티셔츠 뒤집어 입으신 거 아니에요?”

어쩐지. 오전 내내 목이 쫑기더라니...

재킷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를 앞뒤 반대로 입은 채, 반나절을 버틴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미 오전 미팅도 마친 상태였고,

그 와중에 ‘잘 정리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룰루-

이쯤 되면 육아는 회사 바깥의 일이 아니라 내 옷에, 말투에, 습관에 스며든 생활 패치다.


경계가 무너진다.
집에서 아이에게 “응가 다녀왔어?” 묻는 게 자연스러워진 나는,

회사에서 팀원에게 “얼른 치카 좀 다녀올게” 가 튀어나온다.

뱉어놓고 나서 나도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자연스러웠으니 모르겠지 하고.

느긋하게 걷는 척 종종 대고 화장실로 직행했는데.

이미 다 들었겠지, 뭐.

회의실 공기 중에 퍼져 나간 나의 치카치카.

이제 회사와 집의 경계는 없다.

심지어 내 발음까지 육아와 함께한다.


예전엔 그저 ‘귀여운 에피소드’로만 보던 이야기들.
이젠 내가 그 에피소드다.


출근과 육아, 경계 구분이 참 어렵다.

유명인 누구처럼 On-Off를 분명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성실히 하루하루를 그냥 이겨내는 일반인이니까. 뭐, 괜찮다. (아마… 괜찮겠지?)




다음 편 예고 : 에필로그 — “그냥 하는 거지 뭐. 출근도, 육아도”
— 로봇청소기부터 회식 불참, 핑꾸 비타민까지 다 겪고 나니 깨달았다.

일하고, 키우고, 성실히 버티고 소소하게 웃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그냥 하는 거지 뭐. 출근도, 육아도, 글쓰기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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