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침의 미학_점심 안 먹는 사람에게 점심 여쭙기.

짜침계의 상왕 이야기

by 근노보

코로나를 겪은 우리 모두는,
의도치 않게 비대면의 편리함을 알아버렸다.


회의, 면접, 심지어 회식까지도
‘온라인 참석’이 가능한 세상이 도래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대면만이 가능한 세계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회사 점심시간이다.




그 중심엔 ‘점심 빌런 D’가 있다.

이야기에 앞서 간단히 당시 구조를 설명하자면,

빌런 D 아래 두 팀이 있었고
각 팀은 팀장과 4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D는 대부분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다.

“저는 점심 안 먹습니다. 다들 식사 다녀오세요.”

하지만 여기서 대화를 종료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우린, 눈치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도시락 챙겨 오셨어요? 식사 거르시면 건강 상하세요.”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모두의 반복된 멘트까지 더해져야만 비로소 점심시간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도시락 안부 종을 쳐야,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어느새부턴가 '점심 안부 종'은 팀장 1이 울리는 것으로 자연스레 정리됐다.

팀장 1이 종을 치면, 우리 모두는 케이지 밖 점심 세상으로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고는 방심하면 마주한다.


일명 '종 치기' 팀장 1이 하필 오전 반차를 마치고

점심 한창이던 12시 30분에 출근했을 때.


이미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 시간이면 도시락 뚝딱 해결하고 숙면을 하고 있어야 할 D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모니터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종치기의 "식사하셨어요?" 인사에도 한기가 돌았다.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내고 복귀한 직원들의 삼삼오오 밝은 공기는,

이유 모를 냉기에 착석하는 족족 얼어붙었다.


D가 없는 팀즈 창이 분주해졌다.

"화나신 거예요?"

"왜죠?"

"오전엔 괜찮으셨잖아요...."


그때 팀장 1이 등장했다.

"여러분. D께서 10분 뒤에 다 같이 대회의실에 모이라 하십니다."





점심시간을 변곡점으로 기분이 바뀌었다면

개인사일 수도 있겠지 했지만, '전체 소집’인걸 보면 회사 일이겠다.

오전에 그의 무드는 특별할 게 없었고, 조직개편 시즌도 아니다.


회의실에 앉은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D가 들어왔다.


“다 오란 건 아니고, 두 팀장만 보자고 했는데… 이왕 모였으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를 부른 자리가 아니었단 말에
살짝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도리는 하고 삽시다.

?????

...

도리???

눈을 깜빡이며 내가 놓친 도리가 무엇일까...

곱씹어봐도 모르겠다.


이내 D는,

어리둥절한 우리를 위해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점심시간에… 서로 점심 어쩔지, 그런 건 묻는 게 기본이야.



일장연설 30분.


누군가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고,
누군가는 진심으로 반성했다.

나는 그저 속으로 되뇌었다.

'밥을 굶으면 사람이 저렇게 예민해질 수 있구나.'


도리 (道理)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


어차피 안 먹을 자기 점심을 묻지 않았다고 해서,

진짜 그 '도리'를 찾다니.


어이가 없다.


차라리 '니모를 찾아서' 도리가 낫겠다.

어쩌면 '도리도리' 하는 아기도 저것 보단 성숙하겠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날 D는 전날 과음으로 쌀국수가 당겼던 날이었다.


회사란 성인이 모여 굴러가는 곳에서
일을 잘하니, 못하니도 아닌,
안 먹을 점심을 물어봐 달라는 얘기를 들을 줄이야.


이보다 더 하찮은 경험을 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와.. 정말 나, 레어템 부자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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