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에도 손절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반려업무 키우는 사람에게.

by 근노보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빠르게 손절하는 사람과,

될 때까지 물을 타다가 결국 '반려주식'으로 만드는 사람.


이 이야기는 투자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이쯤이면 됐다 싶으면 넘긴다.

완벽하지 않아도 적정선에서 마무리할 줄 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만 더', '이것도 더'를 외치다 업무를 장기 보유한다.

이미 충분한데도 한 번 더 보고, 한 줄 더 방어한답시고 다시 고친다.


마치 반려견을 돌보듯 업무를 애지중지 달래다 보면,

그 자료는 어느새 앞단락과 뒷단락이 상충되는 참사가 벌어지곤 한다.

문장은 꼬이고, 시간은 기한을 도과하기 일쑤다.


우리 부서장님은 전형적인 업무 장기투자자다.

문장 하나도 쉽게 손절하지 않는다.


'낮은 가능성'은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가 되고,

'제한적'이란 표현은 어떤 날은 너무 고상한 표현이라셨다가 어떤 날은 또 너무 직설적이라 하신다.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업무를 잔뜩 끌어안고서는

쉬이 보내지 못하는 그를 보며,

솔직히 '적당히 좀 하시지' 하는 불손한 마음이 들 때가 매우 빈번했다.



얼마 전, 회의 일정 잡는 자리에서 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회의를 마치며 최상위자께서 다음 일정을 물으셨다.

"자, 다음 회의는 수요일이랑 금요일 되는데,
(날 보며) 요즘 젊은 친구들은 금요일 피한다며?
그럼 수요일 할까?"

하필 그 수요일은 부서장님의 수면 대장내시경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마치 귀여운 노호혼 장난감처럼.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보탰다.

"부서장님 수요일 수면내시경이시잖아요.

금요일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부서장님은 굳이 굳이 손사래를 치며

꾸역꾸역 수요일로 확정해 버리셨다. (도대체 왜.....)


그리고 문제의 그날.

둥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마취에서 덜 깬 거대한 까치 한 마리가 회의실로 날아들었다.

멍한 눈빛과 뒤통수 까치집 머리의 부서장님이 거기 계셨다.



거참. 마음이 요동친다.

업무는 그렇게 끝까지 보내지 못하면서,

당신의 몸과 개인일정은 어찌 저리 대충 넘기시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분이 통과해 온 시간은 지금의 우리보다 얼마나 더 야만의 시절이었던 걸까.


힘들다는 말은 책임감이라는 말에 밟히고 채이고.

마취 기운보다 조직의 논리가 더 강력하게 몸을 깨우던

그 시절의 가스라이팅이 그의 몸에 여전했기에,

저 까치집 머리는 결국 고스란히 엉켜있는 인고의 결실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그 순간, 그는 우리네 아버지였다.


그들의 시절엔 '손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겠지.

끝까지 버티고,

물을 타서라도 살려내고,

내 몸 하나 갈아 넣어 우리 회사를 지켜야 했던 반강제의 장기 투자의 시대.


그의 '조금만 더'는 어쩌면 그 시절을 관통한 그만의 상처 자국일 수 있겠다.




나란 놈도 이제 비로소 철이 드나 보다.

나에게도 둘리보다 고길동이 안쓰러운 순간이 와버렸다.

오죽하면 고길동 선생님께서 저렇게까지 분노하셨을까.


오늘만큼은,

부서장님이 또다시 문장을 꼬고 단어를 바꾸자며 '반려업무'를 붙들어도 모두 다 맞춰드리겠다 다짐한다.


평소 같으면 '그 단어나 이 단어나 큰 차이 없습니다'라며 효율을 따졌겠지만,

오늘은 그저 '그 표현이 훨씬 쉽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여 드리고 싶다.


업무는 적당히 손절해야 한다는 내 철학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한다.

업무는 언제든 다시 돌아오지만,

한 번 무너진 몸은 상장폐지 종목처럼 재기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효율보다 마음이 먼저 차트를 뚫고 올라가는 날이 있다.

수면내시경 마취도 깨지 않은 채,

까치집 머리를 하고서도 단어 하나를 소중히 매만지는 저 노병의 뒷모습을 마주한 오늘 같은 날.


자신의 상장폐지 위기(?)조차 무시하고 끝내 출근하고야 마는 저 지독한 성실함에,

나도 오늘만큼은 기꺼이 풀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