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 럭키비키잖아?!

유 알 마이 데스티니

by 근노보

예기치 않은 컴퓨터 다운으로 작성 중이던 메일이나 파일이 흔적도 없이 저세상으로 날아간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런 때는 다운되기 전 작업 분량이 두세 줄처럼 짧더라도, 재작업 자체에 대한 심리적 번거로움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멈춰 있던 '등하원도우미 모시기' 작업도 도무지 다시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 게시글의 '끌올' 이란 세상 간편한 기능이 있음에도 일부 추가된 기준을 설명할 문구 몇 줄 쓰기가 귀찮아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었다.

이 일은 마감기한이 없으니 할 일을 미뤘다는 마음의 짐만 애써 외면하면 된다.


그렇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잘 버텨내는 어느 날.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한 할머니를 마주쳤다.

당시 우리는 세대수가 적은 아파트에 오랜 기간 거주 중이어서 대부분의 입주민은 오가며 눈인사를 하는 사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뵌 분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오르기 시작했고, 흥얼거림으로 적막을 깬 아이를 할머니는 사랑이 가득한 포근한 눈길로 지그시 보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셨다.


이내 나는 눈으로 할머니 뒤를 바짝 좇았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뒷모습을 보자마자 할머니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신비로운 모습을 목격하며 문이 닫혔다.

그 천사가 사는 집은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네 바로 아래층이었다.


곧장 눌려진 버튼을 취소하고 바로 위층인 어린이집 친구네 층에서 내렸다

복직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당장에 아이를 돌봐줄 분이 없는 사정 딱한 처지인 것처럼, 아래층 할머니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인 양 아이친구 엄마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얻는 중이었다.


딩동댕 딩동댕


초인종 소리와 함께 월패드 화면이 켜지는 순간. 화면 속에 바로 그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은 나에게 있어 마치 영화 《노팅힐》 속 장면처럼 —
작은 서점 문을 열고 줄리아 로버츠가 다시 나타났을 때, 휴 그랜트가 잠시 말문을 잃던 그 순간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Destiny였다.


"아기 엄마. 어머 손님이 계셨네. 이거 좀 먹어요. 내가 빵을 샀는데 둘이 먹기 많아.
아기 보느라 힘들 텐데 먹고 기운 내요."


어깨너머로 할머니의 인상을 찬찬히 살피는데, 영락없는 고운 천사의 모습이다.


나는 그 집에 잠시 아이를 맡긴 채

바로 앞 마트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려가 가장 비싼 과일박스를 사서 할머니 댁으로 직행했다.

"저 조금 전에 인사드린 집 친구 엄마고, 같은 라인 8층 사는데요. 제가 출근을 해야 하는데 저희 아이 좀 봐주세요"


게시글 미루길 잘했네. 오히려 좋아. 럭키비키잖아?!

이 모든 것은 단 반나절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부모, 직장인, 생계형 고용인… 그리고 약간의 행운을 곁들인 사람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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